청솔고개
維歲次 辛丑 十二月 丙辰朔 十一日 丙寅
孝子 ** 病未將事代行祀事 孫** 敢昭告于 顯考處士府君
顯妣孺人 仁同張氏 歲序遷易 顯妣孺人 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謹以玄酌 庶羞恭伸 奠獻 尙 饗
"때는 바야흐로 辛丑(신축)2021년 丙辰十二(병진12)월 丙寅十一日(병인11일)을 맞이하여,
孝子(효자) **은 病(병)으로 인하여 孫子(손자) **로 하여금 삼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敢(감)히 밝히 고하나이다.
歲月(세월)이 흘러 仁同張氏(인동장씨)어머니께서 1985년도 그해에 돌아가신 지 36周年(주년) 忌日(기일)이 다시 돌아왔사옵니다.
이제 먼 그날을 追慕(추모)하니 어머니의 恩德(은덕)이 드높아서 하늘까지 닿아 끝이 없나이다.
이에 삼가 맑은 술과 簡素(간소)한 飮食(음식)을 차려 恭遜(공손)히 올리오니, 부디 降臨(강림)하셔서 두루 歆饗(흠향)하시옵소서."
오늘은 할머니의 기일(忌日)이다. 위의 축문(祝文)은 내가 얼마 전부터 한문(漢文)으로 된 축문을 내 나름대로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왼쪽 한문을 오른쪽 한글로 대역(對譯)한 셈이다. 출력해서 오늘 산소에 가서 고축(告祝)한 것이다. 왼쪽 한문 원문을 한 문단씩 초성 살려서 낭독하고 이어서 오른쪽 한글을 읽어내려 가는 방식이다. 내가 아주 어려서는 제사 때마다 고축하던 걸 들었지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참 궁금했었는데 내가 그 뜻을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면 귀신은 진서(眞書)라야 알아 듣는다고만 말씀해 주셨다. 그런가 여기고 더 이상 여쭤볼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주제(主祭)가 되니, 나름대로 혁신을 해야 하겠다고 이렇게 단행한 것이다. 이른바 국한문대역 축문 사용이다.
산소에 가서 이런 방식으로 고축하니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셔서 들으시는 건 알 수 없고 당장 임석하고 있는 제관들에게는 조상 추모하는 마음의 큰 울림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이렇게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의 끈을 의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은 할머니 기일이라서 잠이 일찍 깨졌다. 며칠 전부터 짬짬이 제수 준비는 해 놓았지만 오늘 행여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올리는데 하자가 있을까봐 옷깃이라도 여미고 의관이라도 정제하는 심정이 된다.
할머니는 우리 딸이 태어나던 그해 세상을 뜨셨다. 한 생명이 태어나고 한 생명이 사라졌다. 인간 세상의 순리다. 한 세대가 가면 이를 대체할 또 한 세대는 태어나 그 싹을 틔우는 것이다. 겨울 방학을 맞아서 큰집에 부모님 뵈러 한 번 간다고 가는 그날이었다. 사랑방에 기거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인사드리러 갔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새벽부터 일어나 별안간 머리를 감아 빗어 내리는 등 안 하던 짓을 하신다고 역정을 내신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가 뵙기에도 전에 없이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어머니께서 마침 네가 왔으니 할머니 모시고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하신다. 집 앞에서 바로 택시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 응급실을 찾아서 접수를 했다. 할머니는 병원에 오는 내내 아무 탈이 없는 당신을 공연히 병원에 데리고 왔다고, 쓸데없이 헛돈 쓴다고 바로 집에 가자고 자꾸 재촉하신다. 할머니는 간단한 검사를 끝내고 입원하셨다. 병실로 향해서 가고 나는 입원 수속 등을 하고 있는데 간호사로부터 할머니께서 갑자기 심한 호흡곤란 증세가 있어 용태가 위중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고 통보한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임종을 맞으시려면 이대로 진행하고 집에서 임종하시려면 바로 모시고 가라고 했다.
나는 무척 황당한 나머지 경황 중 더 이상 따져 묻지도 못하고 일단 부모님께 전후 상황을 말씀드리고 바로 할머니를 택시로 집으로 모셨다. 할머니께서는 급격히 의식이 없으시다. 눈은 이미 감겨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계셨고 옆방에 계시던 아버지, 어머니, 바로 밑 남동생이 모두 모였다. 근무 중이던 아내도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 할머니의 호흡이 점차 가빠온다. 한 30분 지나는데 언제 가셨는지 숨기운이 전혀 없으시다. 드디어 가셨다. 병원에서 되돌아온 이후로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짚불 사그라지듯이 가셨다. 바로 인우보증 사망 진단 처리를 하고 부고를 작성해서 인편으로 혹은 속달우편으로 전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후 두 가지 의문 사항을 남겼다. 그 갑작스러운 죽음이 병원측의 주사 한 방 후 급격히 나빠졌다는 해명에 혹 병원의 오진 처방에 따른 의료사고는 아니었을는지, 돌아가시는 새벽에 할머니께서 새벽부터 비녀 꽂은 낭자머리를 곱게 빗어내린 것은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준비하신 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1986년 1월 20일의 일이었다.
증조부님 기일이다. 생전의 인자하시던 모습이 서른여섯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나 있는 내 종제가 다쳐서 경황 중에 숙부모님께서도 제사에 참여 못하신다고 전하신다. 축구하다가 무릎인대가 나갔다고 했다. 한 번 전화하고 꼭 병위문 한 번 가야겠다. 증조부님의 생전의 용자를 나의 뇌리에 남겨두시다가 그렇게 한 겨울에 훌쩍 가신지 한 세대가 흐르고 조부님께서 또 뒤를 이어 한 여름 갈대밭에서 무심한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그렇게 또 가시고……. 이렇게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데 가고 난 뒤에는 누구라고 그렇게 쉽게 잊어지는 것을 보면서 삶의 허망을 실감하고 수용하고 체험하는가 보다. 증조부님이 가실 때 내 나이 초등 6년생 열세 살 그러니까 삼심 육년 전, 평소에 거처하던 사랑채에 마련된 빈소에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웠던지, 죽음이라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그 후 순차적으로 이승을 떠난 많은 어른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모아지면서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이 형성되어 가는 것 같다.
그해 겨울은 참 추웠었다. 마당에는 외말 마을의 터줏대감 집의 상답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고 제일 기억나는 것은 너른 마당에서 큰 통나무를 다듬어서 널을 짜는 모습이었다. 막내아들을 먼저 보내고 맏손자마저 행불된 황망하기 짝이 없는 사태에 직면하면서도 우리 동네 가장 큰 당수나무처럼 의연하고 꿋꿋하셨던 증조부님이셨다. 그 후덕한 모습과 단아한 삶의 궤적이 오늘에 와서야 더욱 진한 기억으로 남는다. 사랑채에는 날이면 날마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방문하셨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번갈아 접빈객하신다고 분주하셨던 장면이 떠오른다. 손이 부족할 때는 나도 한 번씩 술상 심부름을 하였었다. 봄날만 되면 자운영 꽃풀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수리조합 도랑으로 증조부님과 함께 소먹이고 소 풀 베러 갔었다. 그때 함께 불렀던 ‘노란 사쓰 입은 사나이’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2000년 12월 1일 나의 기록이다.
앞은 할머니의 죽음, 뒤는 증조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두 분 다 여든 하나의 천수를 하셨다. 두 분 다 정말 죽음의 복을 타고 나신분이다. 두 분 고종명(考終命)하셨다. 두 분 다 죽음의 복을 타고 나신 거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오셨다가 가을날 휙 불어드는 한 떨기 바람처럼 가셨다.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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