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가지 않은 길, 파타고니아, 안데스, 네팔, 톈산 모두 아직 가보지 않았던 길이지만 이번 내 수술의 길은 내 생애에서 참으로 가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청솔고개 2022. 1. 15. 20:08

 

                                                                         청솔고개

   내일이면 내 척추관협착증 치료를 위한 대장정의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평생 병으로 인해 입원이나 깁스, 큰 수술 같은 것도 한 번 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해야 한다. 사실 이 결단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어지간하면 스포츠마사지를 중심으로 한 만지기나 통증 시술, 산행, 걷기 등 운동 같은 것으로 버티려고 해보았으나 가족들이 완강히 수술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고소원불감청 격으로 응하게 된 것이다.

   내가 한창 마음과 몸이 힘들었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는 하얀 시트에 하얀 유니폼을 입고 캡을 쓴 간호부의 돌봄을 언제 한 번 받아보나 하는 생각을 자주했었다. 저기 병실에 누워있으면 내 심신의 고단함이 다 해소되리라는 막연한 꿈과 기대를 가졌었다. 내가 더 자라서 주변에 심하게 아픈 사람의 고통을 병실에서 목격하게 되고 일찍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니까 이런 생각은 너무나 소박하고 순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전혀 공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수술이라는 신체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행위를 통해서 만에 하나 나타날 수 있는 사소하거나 치명적인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치과에서 마취는 간단히 해 보았지만 허리수술 같은 비교적 큰 수술에서 마취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궁금증은 있다. 전신마취 중 의식이나 정신은 또 어떠해지는지도 궁금하다. 그냥 죽음과 같은 상태일까, 아니면 잠자는 상태, 꿈꾸는 상태와 같은 걸까? 혹 의료사고로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 확률도 궁금하다.

   사람의 노화(老化)는 자연의 이법(理法)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급격한 의술의 발달은 노화와 사멸이라는 자연의 이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가속화하고 있다. 가끔 최고로 의술이 발달해서 인간이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불로장생의 지상 낙원이 현실화된다면 인간 세상은 어떠한 모습으로 돼 있을까 하는 공상(空想)을 해 본다. 1000세와 1세가 함께 사는 세상을 상정해보자. 그 결과 인간 세상은 결국 공멸하고 말 것이다. 만약 공멸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지상의 지옥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만물의 사멸은 결국 만물을 구원하는 가장 큰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그 원리에 거역하려고 온갖 술책을 다 부리고 있다. 이른바 명의의 혁신적인 의술, 새로운 치료제, 새로운 백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기사에서 돼지 심장의 사람 이식술이 성공했다는 걸 보았다. 20년 전부터 시작된 생명공학(生命工學)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나는 산행을 하면서 쓰러져 썩어가는 나무 등걸의 속이 마치 톱밥이나 흙덩이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속에는 개미, 굼벵이 등 온갖 생명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저 굵은 나무 등걸이 이제 사멸해서 또 다른 생명의 원천이 되는구나 하는 생명 순환의 원리를 실감하게 된다. 내가 자주 말하던 ‘참 아름다운 썩음’인 것이다. 이런 사멸의 현상은 큰 축복이다.

   나는 우리 종중의 묘소에 자주 간다. 윗대부터 정렬돼 있는 자연장지 하나의 묘소 규모는 가로세로 2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그 밑에 부부의 합장 유골이 묻혀있다. 백지에 싸서 넣거나 오동나무 작은 곽에 넣어서 묻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서 거의 흙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언젠가 여기 어디쯤의 품계석(品階石) 아래에 묻힐까 하고 상상해 본다. 일종의 임사체험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주 와서 보면 너무 익숙해져서 언젠가 내가 여기 묻히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인식으로 될 것 같기도 하다. 품계석에 안장돼서 지하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과의 소통에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하고 생각도 해본다. 생전에 같은 마을, 같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죽음이란 한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생명현상이며, 죽음도 생의 한 양식이라는 시구의 참뜻을 알만도 하다.

   내가 이번 척추관협착증 수술을 잘 했다고 하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증상의 개선은 일단 이루어지겠지만 노화로 인한 제2, 제3의 어떤 협착증에도 끊임없이 대응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또 답답해진다. 생명현상의 원리를 거스르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탄타로스의 영원한 기갈(飢渴), 시지포스의 도로(徒勞) 같은 신화가 생겨난 것 같다. 이런 신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속성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가에서 생(生)은 불행이고 사(死)는 축복이라는 역설이 있다. 해탈(解脫), 열반(涅槃)이라는 말이 그 반증이다. 마음과 몸의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게 가장 큰 저주요 형벌이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내 생전의 가장 끔직한 생각이 망각되지 못하고 영원히 계속되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것이 바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아닌가. 흔히 ‘’마음이 지옥‘이라는 게 바로 이럴 때 사용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의 사멸은 진정한 축복이다.

   요즘 자주 유명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실이 보도된다. 대체로 이들을 비난하지만 생명 선택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이것도 하나의 인권으로 간주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흔히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아서 버티고 견디면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쉽게 재단한다. 그것 역시 당사자의 절박한 심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피상적인 판단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나는 곧 수술대에 오를 것이다. 내 몸에 칼을 대 가면서 내 생을 유지시키려는 게 생존의 한 역설 같다. 이 부자연스러운 대처이후 다만 내가 바라는 게 있다. 다행이 내가 전보다 잘 걸을 수 있어서 남미 파타고니아 황원(荒原)과 안데스 고원(高原)을 1년 정도 자유롭게 한번 답파(踏破)해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혹 이것이 불가하면 네팔의 산록(山麓)이나 톈산산맥 주변을 한 1년 방랑(放浪)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파타고니아, 안데스, 네팔, 톈산 모두 아직 가보지 않았던 길이지만 이번 내 수술의 길은 내 생애에서 참으로 가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2022.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