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나의 오십년 전 바로 그해 1

청솔고개 2022. 2. 11. 00:25

 

                                                                                                                    청솔고개

   내가 대학 2년 그해다. 그해는 우리 현대사에서는 격변의 시기였다. 내 개인에게도 생의 한 전환점을 가져온 한 해이기도 하다.

   지금쯤 대학은 벌써 신학기 준비로 부산해진다. 가장 큰일은 등록금을 내고 수강신청을 하는 일이다. 한반도의 봄은 어쩌면 대학의 캠퍼스에서부터 오는 것 같다. 지난 1년, 프레시맨에서 벗어나서 이제 전공교과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도 많아졌다. 이때 문학과 국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대, 개념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 국어교육과는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묘하게 엮어져서 가장 순정한 학과의 분위로 형성된 듯했다. 시론과 문학개론, 국어음운론과 문법론 같은 과목은 우리 한국어와 한국문학의 지평과 깊이가 상상 이외로 넓고 깊음을 실감케 했다. 이해 1학기는 작년부터 이어오던 공납금인상 및 교련반대 시위 외엔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학기 초의 신체검사에서 내가 가슴의 병증이 미미하게 포착된 게 가장 큰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했더니 아직 의심소견이 나와서 좀 시간을 기다려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진단을 받는 순간 나는 우울해졌다. 의사는 몸의 병증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많은 활동을 해 보고 시간이 지나 봐야한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일부러 못하는 술도 마셔보고 가정교사 알바, BBS야학 강사, 고등공민학교 야학강사 등 활동을 자청 했다. 내 몸을 일부러 굴려보는 기분이었다. 학대였다. 이러한 활동이 겹치는 날이면 거의 자정 가까이 하숙집에 들어오게 된다. 몸이 녹초가 된다. 일종의 자학성 쾌감 같은 게 느껴진다. 가장 기가 찬 것은 고1, 중2생 영어, 수학과목 가정교사 일이었다. 친구 하나가 하다가 내게 넘겨준 것인데 과외 받는 아이들이 수준이 낮아 쉽게 가르칠 수 있다 해도 내겐 큰 부담이었다. 나도 확실히 모르는 문법, 공식 등에 대한 준비를 안 하고 가서 헤맬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대접한다고 과일 등을 갖다 주었던 학생들의 누나인지 고모인지 하는 사람을 대하가기 참 민망했다.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고향 가야 한다고 하는 핑계로 그 자리를 다른 친구에게 넘겨주고 도망치듯이 벗어났다. 그런 기억에 나는 지금도 실소를 금치 못한다.

   1학년 교양과정부 코스에서 2학년 전공 교과에 들어가니 나의 지적 욕구는 새롭게 솟구쳤다. 시험을 앞두고는 1주일 전부터 학교 도서관에 자리 잡고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지난해에 이어 내 생애 가장 열정적으로 파고 들었던 것 같다. 6월에는 아직 흩어져 있던 같은 과의 학생들의 결속을 위해 운문산으로 1박2일 등반했던 기억이 참 생생하다. 여기서 내 생애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된 셈이다. 이른바 야학에 인연이 닿아 발을 들인 것이다. 거의 은둔형 외톨이이었던 내게 나름대로의 활동성을 추가한 것이다. 드디어 여름 방학이 됐다. 나는 드디어 확진을 받았다. 위기나 절망감보다는 자학적인 쾌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고향에 돌아왔다. 긴 여름을 깊은 사색과 집요한 독서에 빠져 들었다. 현재 나의 생에 대한 사유,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은 거의 그 무렵 형성된 것 같았다. 나는 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공원의 숲을 찾아 매미 소리 들어가면서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지드와 릴케를 읽었다. 불경, 니체, 까뮈, 샤르트르, 타고르도 만났다. 빠져들어 보았다. 드디어 나는 운명적으로 내가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 특히 헤세의 하늘과 구름, 나비와 강물을 통해 세계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관념을 얻게 되었다.

   고뇌와 침잠의 여름은 지나고 가을이 왔다. 캠퍼스에는 묘한 긴장과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다반사였던 단순한 대학가의 시위와는 다른 것 같았다. 매년 도서관 앞 느티나무에서 그 도시의 가을이 가장 먼저 온다. 검고 짙은 홍색 느티나무 잎은 계절의 전령사였다.

   그러기 얼마 후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무서리가 내린 아침 등교하는데 캠퍼스는 탱크에 의해 포위되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된 것이다. 군부정권은 이제 그 말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때는 안목이 좁은 일반 대중들은 그런 사실을 잘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학생들은 일순 엄청난 공허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청춘들의 한국판 허무주의가 휩쓸기 시작했다.

   가을 날씨가 나날이 쌀쌀해져 간다. 나는 내 몸에 부대낄 정도로 과한 하루 일을 마치고 새로 옮긴 하숙방에 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곤 하였다. 가을이 깊어짐에 따라 양옥 2층 독방 하숙방은 점점 서늘해져 갔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한밤에 창을 통해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도심의 명멸하는 불빛들만 나의 실존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외로워졌다. 더욱 힘들어져 갔다. 내 심신은 무서리를 만난 푸성귀처럼 사들사들해져 갔다. 매 끼니 후마다 복용하는 약이 습관화 됐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만의 귀의하고 싶은 존재를 찾게 되었다. 나의 닛시. '닛시는 나의 깃발'. 나는 닛시를 향해 매일 편지형식의 기도문을 띄웠다. 나는 타고르의 '원정'이 되었다. 끊임없이 구가하던 타고르의 '기탄자리'처럼. 닛시를 향한 기도문이 당시 나의 생애깁기였다.   2022.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