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그해 가을이 더욱 깊어 가고 있었다. 나는 2층 독방에서 아직 온기 하나 없는 서늘한 장판에 등을 대고 몸을 뉘면서 짐승처럼 웅크리며 실존을 이어갔다. 퉁퉁한 하숙집 아줌마가 내지르는 말소리, 초등학교 생 딸의 모습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그 가을날들이었던가.
어쩌다 리포트 제출을 위해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군부의 구둣발에 짓밟힌 캠퍼스 강의실은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었다. 모두들 참담했다.
10월 유신 하의 학원가는 온통 회색빛 투성이이다. 우울한 청춘의 분위기였다. 우리는 학교 강의 대신 과제를 받아서 소중한 청춘의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뭔가 기분의 대전환이 필요했다. 단짝 친구와 설악산을 목적지로 한 동해안 여행을 제안했다. 가을비 뿌리는 동해선 북행 열차 안에서 우리는 모처럼의 여정에 대한 기대나 설렘보다는 알 수 없는 음울한 기운이 우리를 휘감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를 쫓아오는 도무지 걷힐 것 같지 않는 짙은 가을안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태백 준령의 이름 없는 역사에도 암울한 기운에 휩싸이고 있었다. 여행 출발하는 그날도 음울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떠났다.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영주에서 내려 강릉까지 갔다. 열차 차창가로 보이는 70년대 초반 한반도의 그림, 핍박과 가난의 흔적이 등뼈 곳곳에도 상처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강릉 지나 경포 역까지 갔다. 날이 저물었다.
역사 앞 송림에 야영준비를 했다. 엊그제부터 내린 가을 진 비에 젖은 땅에 텐트를 친다는 게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텐트를 다 완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플랫폼 안의 역무원이 우리더러 안에 들어와서 하룻밤 자도 된다고 했다. 대신 내일 새벽 첫차 출발하기 전까지는 철수하면 된다고 했다. 그 역무원 배려 덕분에 우리는 땅의 찬 기운을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우리는 그 때 어떻게 하룻밤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날씨로는 설악산까지 가는 게 무리라고 결론 짓고 도중 회귀하기로 했다.
새벽에 잠이 깨서 내려가는 첫차를 기다리는데 역무원이 여기 경포 역까지는 하루에 몇 번만 운행한다고 했다. 강릉까지 가서 타야한다고 했다. 우리는 강릉에서 하행 열차 시간을 맞춰 철길을 걸어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철교도 위험스레 그대로 건넸다. 강릉역에 도착하니 5분 전에 하행 첫 열차가 떠나고 없었다. 허탈했다.
그 다음 차는 화물열차인데 객차 두 량을 붙여서 운행하니 그거라도 타고 가려면 그러라고 했다. 우리는 되물어 볼 것도 없이 그냥 타버렸다. 역이라고 생긴 역은 다 정차해서 석탄이란 목재를 내려다 준다. 최소 30분, 길게 정차하는 곳은 3시간도 더 걸렸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1박 2일 걸린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북평 역에 내렸다. 지금은 이 지명이 없어졌다. 그 동안 동해시에 편입돼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3시간 정차한다고 하기에 우리는 항구와 거리 구경에 나섰다. 태백 준령을 껴안고 있는 이 거리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북평항은 전쟁의 폐허와 같았다. 내 생애 그렇게 참담한 폐허를 처음 보았다. 찢어진 어선 파편에서부터 고무신짝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하늘도 잿빛, 바다 물색도 짙은 잿빛, 해안 모래사장도 검은 색이었다. 지난여름 동해안을 몰아친 해일 피해를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고 누가 말해 줬다. 그래도 갈매기는 날고 있었다. 나는 더욱 비감해졌다. 문득 그때 읽었던 헤세의 골드문트가 헤매었던 전쟁의 폐허가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다면 이게 진정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정이 지체되는 바람에 여비가 다 떨어져갔다. 우리는 가게에서 빵 쪼가리를 사서 물과 함께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허기만은 면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시대의 가난을 즐기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 다음날 오후 늦게 그 화물열차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시속 30킬로미터도 안 되는 목탄차 같은 화물열차의 승강구에 매달려 하염없이 짙어 가는 태백준령의 단풍과 풀풀 날리는 석탄 가루를 덮어쓰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역 구내를 빠져나왔다.
내 생애에 가장 여행다운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이후 모름지기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신념이 굳어졌다. 우리는 지금도 그 때의 동행을 만나면 그 참담한 여행기를 주고받기를 즐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떠남의 동기, 우연함, 어긋남, 배고픔, 불안감, 암울암이 다 점철된 여정이었다. 그건 어떤 책보다, 어떤 말씀보다 나를 성장시킨 빛나는 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50년 전 그해 늦가을을 떠올리면 창백하고 메말라 버린 나의 음울한 표상이 흑백필름처럼 인화된다.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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