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이제 처음으로 제법 덩치가 큰 물고기가 낚싯밥을 건드려보았다. 훌륭한 낚시꾼은 낚싯대와 줄을 통해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스는 낚싯대를 내버려둔 채 간단한 손낚시를 가지고 갔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낚시질이었다. 실을 손에 쥐고 하는 이 낚시질은 낚싯대나 낚시찌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낚싯줄과 낚싯바늘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약간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훨씬 재미가 있었다. 미끼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물고기가 먹이를 건드리거나 입으로 물거나 할 때에도 그 기미를 알아차려야 한다. 낚싯줄이 움찔할 때에는 바로 눈앞에서처럼 물고기들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움푹 팬 좁다란 골짜기에는 강물이 굽이치며 휘감아 돌고 있었다. 어둠이 일찍 찾아들었다. 강물은 거무스레한 빛깔을 띠며 다리 아래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아랫녘의 물레방아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둑 위로는 물거품이 하이야 눈처럼 빛나고, 수면 위에는 따사로운 산들바람이 흔들거렸다. 하늘 위로는 손바닥 크기만 한 눈부신 구름 조각 여럿이 <무크베르크> 위에 떠 있었다.” 이것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김이섭 옮김)에 나오는 장면이다.
나는 요즘 티브이에서 낚시채널을 자주 찾는다. 낚시에 대한 평생의 로망을 대리 충족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의 대부분 내가 꿈꾸던 그런 낚시의 로망을 찾지 못하곤 한다. 그 로망은 대학 1학년 때 헤세를 만나고 난 뒤 생겼다. 그의 작품 곳곳에 낚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그전까지 내가 생각했던 낚시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헤세의 낚시는 사색과 명상, 자연 및 우주와의 완전한 대화이고 소통이었다. 지금의 대중 낚시는 어쩐지 탐욕 같다. 이런 생각은 최근 더욱 나의 뇌리에서 강하게 인지된다. 대학 2년 늦가을, 한 친구 따라 생애 최초로 낚시하러 갔다. 그것도 밤낚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처지와 성향이 아주 잘 통하는 편이었다. 모두 형편이 고만고만한 터라 변변한 텐트 하나 없이 그냥 얇은 비닐 포대 몇 개만 준비했다. 물에 카바이드를 넣으면 그 반응 가스로 조명하는 속칭 간데라를 준비해서 오후 늦게 근교 저수지로 버스를 타고 떠났다. 당시는 군부독재정권의 10월 유신 선포 직후라 대학은 휴교 중이었다. 뜻과 용기가 특별하였던 극소수의 친구들은 어디선가 조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항쟁할 계획을 세웠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 그렇게 밤낚시나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비겁한 도피 같기도 했었다.
촛불보다 조금 더 밝은 간데라 불빛에 찌에 붙인 야광 테이프가 가물가물하거나 반짝반짝했다. 자정이 지나니 추위가 엄습했다. 얇은 비닐 포대는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밤공기에서 서리는 한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입술이 덜덜 떨리어 왔다. 그렇게 벌벌 떨다시피 하다가 새벽녘에 끓인 라면 국물에 속을 덥히는 것이 추위 피하는 방법이었다. 새벽 3시에 추위와 피로로 인한 졸음이 몰려왔다. 비몽사몽간에 응시하고 있던 찌가 까딱까딱하는 게 눈에 뜨였다. 이 때다 싶어 친구가 가르쳐 준 대로 살짝 낚싯대를 쳤더니 뭔가 불빛에 번쩍거리는 게 보인다. 손에는 물고기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 무게는 정말 기분 좋은 무게다. 이건 삶의 무게가 아닌 기적과 환희의 무게다. 떡갈잎 크기만 한 붕어가 대롱대롱 달려 나온다. 기적의 현현이었다. 흔히 낚시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한다. 한 순간도 찌에서 눈을 떼지 말다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채는 동작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도의 정신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어떤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생애 처음 손맛이었다.
나중에 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첫 낚시 가서 마수걸이를 하지 못하면 다음에는 어지간해서 다시 낚시 따라가지 않는다고들 했다. 아무리 낚시를 도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마음을 비우고 고기를 낚는 게 아니라 세월을 낚는 거라고 의미 부여해도 거의 12시간 이상을 입질 한 번 받지 못하고 그냥 공친다면 다시 따라 나설 강태공은 드물다는 것이다. 나는 생애 최초 출조(出釣)에서, 그것도 밤낚시에서 크고 작은 토종붕어 대 여섯 마리의 조과(釣果)를 올렸으니 대단한 행운인 것이다. 우리는 번갈아 얇은 비닐을 깔고 덮으면서 새벽에 한 두 시간 잠은 잤다. 아침이 되니 아주 멍한 상태가 되었다. 다시 버스로 시내에 있는 그 친구 집에 가서 아침을 얻어먹고 헤어졌다. 생애 첫 도반(道伴)이었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후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 후 그날 밤을 새우면서 내가 생전 처음 목격했던, 출조 첫날밤의 그 모든 물상(物象)은 평생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다음 해 여름이 됐다. 여름 방학이다. 낚시의 철이다. 나는 헤세 따라 낚시하는 꿈에 가슴이 설레었다. 나는 근처 일제 강점기부터 농업용수지로 활용됐던 아주 큰 못의 맞은편 언덕에서 무작정 낚싯대를 드리웠다. 찌는 듯이 더운 날씨였다. 하늘의 구름도 이글거리는 태양에 말라드는 듯했다. 오전 내내 감감 무소식이었다. 거기에는 나지막한 미루나무 한두 그루뿐이라 뙤약볕에 한 나절 정도 지쳐 갈 무렵 갑자기 찌가 푹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엉겁결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낚싯대를 당겼다.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25센티는 족히 돼 보이는 토종붕어였다. 이게 바로 낚시의 묘미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나는 50년도 더 전 그날 그 순간의 손맛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22.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