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 ‘문학의 힘과 역사의 힘’ (3/4)
청솔고개
(2)
“……그 날 밤 호텔 방에서 반쯤 그늘진 어둠 속에서 암갈색 학생복을 입은 소녀였던 당신은 지금하고 똑같아서, 마찬가지로 숨 막힐 만큼 아름다웠어.
그 후 나는 그 날 밤 당신이 나에게 전달해 준 매혹(魅惑)을, 그 아련한 광채(光彩)를 나중에 나를 아주 사로잡아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그 되울림을 이름 짓고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했어. 여학생 복을 입은 그림자처럼 그 방의 어둠으로부터 당신이 솟아올랐을 때, 당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소년인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온통 반응을 보이는 고통스러운 강렬한 의식을 느끼면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고, 이 앙상하고 여윈 어린 소녀가 세상의 모든 여성다움으로 전기처럼 충전되었음을 알았어. 만약 내가 손가락 끝으로 당신을 건드렸다면 불꽃이 튀어 방안을 밝히고, 즉석에서 내가 죽었거나 내 평생을 슬픔과 그리움의 자력파(磁力波)로 충전시키겠지…….” [『의사 지바고』하권 182~183쪽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의사 지바고』가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되어 왔지만, 그의 이름을 서방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의사 지바고』와 그의 노벨상 수상 거부에서 비롯된다. 1958년도 노벨 문학상에 이 작품이 결정되자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세계적인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소련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의사 지바고』에 대한 노벨상 수상 결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동서간의 이데올로기적 충돌에 의해 야기된 냉전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전통을 올바르게 이어받은 이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와 독창성을 손상할 수는 없었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에 모스크바의 매우 교양 있는 유태인계 러시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스크바의 회화 조각 건축학교의 교수이자 유명한 화가였고 어머니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유명 피아니스트였다. 1908년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입학, 이듬해 역사철학과로 옮겨 1913년에 졸업하였다.
파스테르나크의 문학적 경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는 처녀시집 『먹구름 속의 쌍둥이』를 발표한 1914년부터 1932년의 『제2의 탄생』까지의 시기다. 독일의 시인 릴케와 러시아의 동시대 시인 블로크의 영향 밑에서 시인으로 출발한 파스테르나크의 시작품들 속에는 이들의 영향이 역력하게 엿보인다. 그의 초기 시작품은 예술적 향기가 높고 세련되고 특이한 시풍으로 당시의 러시아 사단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코뮤니스트들은 그의 시에 상징주의적인 영향이 엿보이며 동시대의 여러 문제에서 도피하려는 경향과 시적 테마가 고독한 인텔리겐치아의 기분과 체험의 좁은 울타리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의 시에는 ‘부르주아적, 병적, 염세주의적, 형식주의적, 개인주의적’이란 딱지가 붙어 다니고 있다.
그의 시에는 고전주의적 전통과 상징주의자들의 음악성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심상과 결합된 미래주의자들의 구어적인 경향이 융합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제 2기는 제 2차 세계 대전이후로, 이 시기에 그는 시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고 언제 출판되리라는 기대도 없이 모스크바 근교의 페레델키노의 별장에 틀어박혀 『의사 지바고』를 집필하기 시작한 시기다.
전후에도 그는 계속 침묵을 강요당하여 번역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사후의 해빙기에 발표가 금지되었던 『의사 지바고』는 러시아에서 출판될 희망이 보였으나 원고가 검토되고 난 뒤에 발표가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1957년에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로 최초로 번역, 출판되었다.
(3)
“……나는 내 눈은 철철 넘칠 만큼 눈물로 가득 찼으며 나는 울었고 내적으로 광채를 내었어. 나는 소년인 내 자신에 대하여 한없이 슬펐고, 소녀인 당신에 대하여서는 더 슬펐지. 내 몸 천체는 충격을 받고 울었어. 만일 사랑을 하고, 이 전류로 충전됨이 그토록 고통스럽다면, 여인이 되고, 전류가 되어,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얼마나 더 고통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그래, 난 결국 얘기해 버렸어…….” [『의사 지바고』 하권 183쪽에서]
이 소설의 배경은 1905년의 제1차 혁명과 1917년의 10월 혁명, 그리고 그 혁명이 현실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작품 속에서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차리즘의 러시아가 붕괴되는 일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 지바고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의 생애와 죽음의 이야기이며, 인텔리겐치아가 혁명을 경험하는 과정과 혁명의 결과로서의 인텔리겐치아의 멸망사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유리 지바고는 시베리아 부호(富豪) 산업가의 아들로, 열 살에 고아가 되어 혁명 이전 러시아 상류 계급 문화의 전형적인 산물(産物)로 자라나며, 마찬가지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편(全篇)을 통해 나타나는 지바고의 주요 목적은 자신의 영적(靈的) 독립성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는 간접적으로 전쟁과 혁명에 참여하지만 아웃사이더로 행동하고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지바고는 혁명이나 어떤 이념보다도 삶과 생명 자체를 강렬하게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로부터 탈출하거나 자신의 자유 속에 유폐(幽閉)되고자 하지를 않는다. 오히려 그는 혁명을 환영하고 처음에는 혁명의 소용돌이와 보편(普遍)적인 정의라는 혁명의 꿈과 혁명의 비극적 미를 즐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그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할 것인가를 지시할 때면 그는 저항하며, 혁명에 대한 소외감(疎外感)을 느끼고, 이 소외감은 적대감(敵對感)으로 변한다.
자아의 절대적 가치를 믿는 지바고는 ‘틀에 박힌다는 것은 인간의 최후이며 인간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다’고 말하며 공산주의적 획일적인 ‘혁명’ 이념에 반대한다.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 우랄산맥의 조그마하고 황량(荒凉)한 마을에서 조용한 삶을 향유(享有)한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여인인 라라의 재회(再會)와 사랑은 왕성한 생의 의욕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평온한 삶과 사랑도 순간일 뿐, 그는 강제로 적군(赤軍)파에 가담하여 의사의 신분으로 시베리아 전역(全域)을 누비게 된다. 그의 가족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추방당하게 되고 라라는 만주로 떠나야만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날 무렵에 그는 완전하게 고독하게 되고 환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심장병으로 객사(客死)하게 된다. [위의 글은 1986. 여름에 기록한 것임, 다음 4/4편 이어짐]
[참고한 책]
-보리스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安正孝 譯, 고려원, 1978.)
-보리스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박형규 옮김, 학원세계문학, 1985.)
-버트램. D.울프 : 『詩人과 革命家』(임영일, 이강은 옮김, 겨레, 1985.)
-<世界映畵音樂全集>(省音社,1979.)
2020. 6. 7.
'한 줄 읽기의 감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걸어 보니 2…… (0) | 2022.03.04 |
---|---|
다시 걸어 보니 1…… (0) | 2022.03.01 |
『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문학의 힘과 역사의 힘’ (4/4)/시베리아 벌목장(伐木場)과, 『닥터 지바고』 라라의 테마 로케 현장인 스페인 마드리드 교외 꽈라다하라 평원도 함께 (0) | 2020.06.08 |
『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 ‘문학의 힘과 역사의 힘’(1/4)/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소설 작품의 서사구조는 엇바뀌면서 내 인생역정에 깊은 각인(刻印)이 돼 있었다 (0) | 2020.06.06 |
금잔화와 헤세의 여름/나의 내면은 이 여름이 되면 벌써 가을의 도보 여행을 꿈꾼다 (0) | 2020.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