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 ‘문학의 힘과 역사의 힘’(1/4)
청솔고개
요즘 난데없이 세상이 몇 달 동안 딱 막히다시피 하니 이동의 자유로움이 더욱 절실해진다. 특히 먼 곳으로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지난 날, 내가 스치고, 오가고, 떠나왔던 여행길을 속으로 떠올려보면서 그 충동을 다스려 본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활동’이 결코 쉽고 당연한 것이 아니고 더욱 소중하다는 걸 더욱 실감하게 된다. 4년 전 오월의 끝자락 나의 러시아 여행에서 그 여행이 비록 문학기행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를 떠나면서 근교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설 『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 의 산실인 페레델키노를 그냥 지나친 아쉬움이 남아있다. 이 페레델키노는 『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의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기념관과 묘지가 있는 곳이다. 러시아의 근대 격변기를 그린 대서사시 격인 『의사 지바고(DOCTOR ZHIVAGO)』와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진 라라의 테마가 깔린 그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 번 소환해 보고싶다. 이와 관련된, 청년 시절 때 남긴 나의 기록을 4회로 나누어 다시 정리해 본다.
(1)
“……그러니까 적어도 그 동안이나마 우리 뜻대로 살아야 해. 삶의 작별을 고하고 우리들이 헤어지기 전에 그 시간을 마지막으로 함께 지내며 보내야지. 우린 우리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과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와 우리가 꿈꾸던 삶과 양심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와 우리들의 희망과 우리 서로에게 작별을 고해야지. 우린 서로 아시아 대양(大洋)의 이름처럼 위대하고 평화로운 밤이 우리들이 나누는 은밀한 얘기를 다시 한 번 나눌 거야. 내 인생 끝에 당신이 전쟁과 혼란의 하늘 밑에서 당신이 어린 시절의 평화로운 하늘 밑에서 처음 나타난 당신이 서 있다는 건 무의미하지 않아…….” [『의사 지바고』하권 182쪽에서]
위의 인용문은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Yuri Andreyevich Zhivago, 유라, 유로치카)가 라리사 표드로브나 기샤르(Larisa Fyodorovna Guishar, 라라 안티포바 LARA Antipova)에게 사랑과 번민(煩悶)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소설 속의 이 한 구절을 통해 우리는 문학의 고전적 개념에서의 서사시가 지니는 모든 요소를 갖춘 대작으로서, 러시아가 거친 격동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삼아 전쟁과 혁명과 사랑과 죽음과 운명과 인간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문학의 힘을 문학 자체의 제한적인 추상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문학의 힘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의 힘에서 제외되기 쉬운 뜨거운 열정과 신비적 상상력으로 그 시대를 증언하는데 있다. 위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20년도 더 전 나의 청년시절에 긴 인내심을 가지고 『의사 지바고』를 독파(讀破)해 나가다가, 문득 이 대목을 만났을 때, 정말 나의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뜨거운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혁명의 격동기를 맞이한 지바고라고 하는 지식인의 고뇌에 대해서 솔직히 당시에는 내가 얼마나 공감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격동기를 감당하는 지식인의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다소 장황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뜨거운 혁명가와 고뇌하는 시인과 인간으로서 진면목을 동시에 느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정확히 말하면 1979. 10. 21. 나의 독서수첩에 기록되었던 그대로다. 그 후 동명의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았다. 한동안 나의 뇌리에는 주인공 가족들이 눈 덮인 자작나무 숲길로 해서 시베리아 시골 마을 바리키노로 은거하가 위해서 가는 장면, 유라친에서 유리와 라라의 극적인 만남, 불안한 동행, 이 둘의 바리키노로의 피신 등이 소설의 상상장면과 영상의 장면이 교차되곤 했었다. 섬광처럼 번득이기도 하였다. 영화의 배경으로 펼쳐지는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소설 작품의 서사구조는 엇바뀌면서 내 인생역정에 깊은 각인(刻印)이 돼 있었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감독한 데이비드 린은 영화『아라비아 로렌스』를 제작한 거장이다. “로렌스는 이상을 위해 싸운 인물이었으나 지바고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한 청년이 혁명이라고 하는 격렬한 난동시대에 어떻게 인간적으로 그 애정에 충실하려고 했던가? 그리고 혁명이 배경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규모 스펙터클이 되겠지만, 나는 혁명과 정치비평보다는 자기의 신념과 사랑에 충실하고자 한 청년 지바고,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여성상을 비롯해서 다채로운 인간상을 묘출(描出)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은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타난 광대한 러시아의 자연, 그리고 인간 사랑과 미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먼저 받을 수 있었겠지만 다행히 나는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게 되어 나의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즐길 수도 있었다. 영화 『탁터 지바고』의 주인공 지바고 역에는 당대 최고 성격배우인 오마 샤리프. 처자가 있는 지바고와 숙명적인 사랑에 빠진 라라 역에는 몸은 작으나, 청순가련한 동양적인 페이스가 돋보이고, 허스키보이스도 매력적인 24세의 유니크한 글래머 스타인, 영국의 줄리 크리스티. 이들이 엮어내는 영화음악의 백미(白眉)인 “라라의 테마”가 내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서너 번 정도는 본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나서 단 한 번, 특히 20대에 시인 한 번, 혁명가 한 번 안 돼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젊은 시절에 한 번이라도 나름대로의 이상(理想)을 꿈꿔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일 게다. 시인도 혁명가도 이상을 추구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이상은 세월이 흘러가면 점차 현실의 장벽에, 때로는 공허한 논리의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시들게 된다. 『의사 지바고』는 우리의 이러한 이상이 현실의 장벽에 어떻게 바뀌어가는가를 나름대로 짚어볼 수 있어서 그 난삽(難澁)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자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작품이다. [위의 글은 1986. 여름에 기록한 것임, 다음 4/2편 이어짐]
[참고한 책]
-보리스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安正孝 譯, 고려원, 1978.)
-보리스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박형규 옮김, 학원세계문학, 1985.)
-버트램. D.울프 : 『詩人과 革命家』(임영일, 이강은 옮김, 한겨레, 1985.)
-<世界映畵音樂全集>(省音社,1979.) 2020.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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