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유월이다. 이제 여름이 시작된다.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가는데 낮에는 햇살과 바람에 여름 기운이 많이 섞여 있다. 여름 냄새가 제법 난다. 아침저녁의 선선한 기운과는 다르다. 강가에는 물 따라 샛노란 물감을 흘려놓은 듯 한 금잔화 꽃 더미가 초여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이 강가에 따라 지난 4월까지 같은 규모로 자리 잡고 있었던 유채 꽃 더미와는 또 다른 노랑이다. 나도 저 금잔화 꽃 더미를 물감으로 그려보고 싶다.
내게는 여름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게 있다. 헤세가 그린 수채화 풍경이다. 대학 1학년 첫 여름 방학을 맞이해서 고향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첫 방학이라 시간이 많았다. 시내 헌책방에 가서 볼 만한 책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방랑(放浪)》이란 제목의 수필집을 하나 만났다. 헤르만헤세가 지은이로 되어 있다. 좀 낡아 보였지만 제목과 표지 그림이 나를 끌어당겼다. 표지 그림은 헤세의 다른 책에서 자주 보였던 그가 직접 그린 수채화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흐르고 태양은 빛나고 있는데 호수 옆 풀밭에는 외로운 농가가 한 채 있고, 그 옆으로 난 길을 한 사람이 걸어 가고 있는 풍경으로 기억이 된다. 그그림은 부드러운 초록색, 연두색, 하늘색이 기조로 돼 있었다. 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헤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였다. 그의 작품의 기조는 바로 이 《방랑(放浪)》 수필집의 표지 그림과 통한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늘과 구름, 꽃과 나비, 바람과 햇살, 그리고 풀밭과 집시의 소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만의 도보여행을 통한 방랑 이야기는 이후,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종횡으로 얽혀져 있다. 그의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함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문학과 철학, 생애에는 헤세가 소중히 여기는 고향의 이러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끝없는 방랑이 흐르고 있다. 그가 즐겨 그린 수필 작품은 농가, 산길, 마을, 다리, 비 내리는 날, 호수와 나무와 산, 구름 낀 하늘……등, 그가 그린 수채화 그림 그대로다. 이후 나는 여름만 다가오면 헤세의 이 풍경이 마음속에서 떠오른다. 여름날 낚싯대를 들고 갈대가 무수한 호숫가로 가는 한 소년, 초가을인데 아직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먼 길 떠나는 도보 여행자……. 혹은 초원에서 꽃과 나비를 찾고 쫓다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서 보니 집시 소녀가 다가와 그에 볼에 입맞춤 하는 정경……. 그의 세계관은 그의 문학적 성장과 더불어 그 지평이 넓어지게 된다. 당시 서구 중심의 정신세계로는 도저히 그가 추구하는 세계와 참된 삶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없음을 알고, 인도와 중국 등 동양의 세계관까지 깊이 천착하면서 끝없이 방랑했던 영원한 도보여행자……. 대체로 이런 것이 그의 작품을 접하고 난 다음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이미지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세계 명작 소설은 즐겨 읽었다. 많이 알려졌다고 보는 그의 《데미안》을 접했지만 당시의 평가나 명성과는 달리 그 작품은 나에게는 별로 큰 감동이나 문제의식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이 수필집은 단박에 나를 헤세의 세계로 푹 빠져 들게 했다. 나는 그 당시 이 《방랑(放浪)》을 들고 집 근처 못이나 강물이 바라다 보이는 풀밭에 누워서 읽었다. 그가 꿈꾸고 있는 풍경을 그 자연에서 느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작품 세계는 이후 평생을 두고 나의 인생관, 문학관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의 내면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한 산맥이 되었고, 흘러가는 큰 강이 되었었다. 그의 작품들을 접하고 난 이후 난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름의 호수, 풀밭, 나비, 구름, 길을 좋아하게 되었다. 낚시도 좋아했다. 이런 것들은 원래 내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더 새롭게 느껴졌다. 여름날의 꿈, 가을날의 방랑을 그린 그의 산문은, 내게는 그냥 산문이 아니라 한 구절구절 모두 시적 영감으로 다가왔다. 나아가서 세계의 모든 사물, 현상이 헤세라는 필터를 거쳐서 새롭게 해석이 되고 인식되었다. 한마디로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탄생하는 듯했다.
나의 내면은 이 여름이 되면 벌써 가을의 도보 여행을 꿈꾼다. 그가 평생 거쳐 온,《청춘은 아름다워라》, 《페터 카멘진트》, 《수레바퀴 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 《황야의 늑대》, 《유리알 유희》 그길을 나도 한번 방랑해 보고 싶어서다. 그게 초원이든, 먼 길이든, 전쟁터이든, 집시 여인이 사는 골목길이든. 2020.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