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에서 2, “봄날 해는 길고도 길다. 나는 또 먼지가 켜켜이 쌓인 아버지의 유작(遺作) 1책을 수습한다.”
청솔고개
불현듯 이 빈집이 지금 나의 처지나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미 낡아서 뭔가를 더 담고 더 실을 수 없어진 수레다. 그 수레는 삐거덕거리고 흔들거린다. 그런데 자꾸 뭔가 더 보태고 싶어지는 욕념을 끊을 수 없다. 주변에서 나한테도 자주 그런 평가를 내린다. 그럴 때마다 짐짓 부정하고 싶어진다. 있는 거 비우지 않고 모두 다 지니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인데 실어 담을 곳은 더욱 좁아지는 내 인생의 수레다.
이를 보고 있노라니 청년 시절에 술 한 잔 하면 자주 읊었던 ‘전원장무(田園將蕪)하니 호불귀(胡不歸)'라는 옛 글귀가 떠오른다.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옛 전원으로 돌아가서 황폐해지려는 고향집을 지키려는 기개와 감성이 깔려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나의 전원을 훅 떠나려고 하지는 않는가. 외면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것이 아무리 주변의 강권이라고는 하지만.
길거리와 주변은 활기에 넘치는데 이 빈집에는 먼지와 바람, 떨어진 꽃잎 부스러기와 겨우내 쌓인 낙엽만 가득할 뿐이다. 아버지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취중에 주어다 심어놓으신 해송(海松)은 철 이르게 송화(松花)를 흩트릴 채비를 하고 있다. 마치 주인한테 버려진 강아지가 아직 주인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봄날 해는 길고도 길다. 나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아버지의 유작(遺作) 1책을 또 수습(收拾)한다. 2023.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