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삼라만상 존재의 으뜸 원리는 봉별(逢別)의 무상(無常)함이라 할진대, 무릇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헤어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이를 얻어서 영유아기를 거치면서 나날이 달라지는 모습에서 어떤 기적을 발견한다. 그 발달, 성장해 가는 모습에서 부모는 평생의 대견해함, 평생의 기쁨, 평생의 즐거움을 다 누리고 맛본다. 첫 눈 맞춤, 첫 옹알이, 첫 배밀이, 첫 일어섬, 첫걸음 떼기는 키우는 이에 대한 무상(無上)의 보상(報償)이다. 그 아이에게 쏟은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은 그 순간순간 해결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을 위한답시고 탐욕스럽게도 그 아이의 전 생애를 통해 뭔가를 끊임없이 얻으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이는 마치 내가 자식에게 그만큼 투자를 했으니 그에 합당한 결과물을 회수해야 한다는 경제논리를 앞세우는 것 같다. 내가 고생해서 키웠으니, 아이가 남만큼 공부해 주고, 고만고만한 일자리 얻고, 무난한 배필과 혼인을 해서 원만한 가정을 꾸리고 자식까지 나아서 집안을 번성케 해주기를 바라는 그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바람은 아주 소박해 보인다. 보통 부모의 아주 소박한 바람 같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부모의 욕심으로 똘똘 감춰져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열망이 부모가 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요청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내면에는 엄청난 욕심이 똬리 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흔히 자식한테 실망한 나머지 보통의 부모가 그 자식에게 “내가 니 키우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다 참고, 키워놓았더니 니가 그럴 줄 몰랐다!” 하고 원망한다. 자식은 내가 아니다. 더구나 내 것은 더욱 아니다. 소유가 아니다. 그냥 존재이다. 그 존재는 존재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 이상, 이하의 의미 부여는 이기심의 발로다.
우리는 이러한 집착을 비단 자식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까지도 점차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첩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노경에 접어들수록 그렇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모든 관계 사이의 애별리고(愛別離苦)도 집착이다.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 다육이들은 길게는 사오 년 짧게는 일이 년 동안 우리 집 베란다에서 커가면서 매 순간 생명 성장의 기쁨과 즐거움을 내게 주었었다. 그리고 물과 흙, 티끌과 바람으로 돌려보냈다. 아니 스스로 돌아갔다. 일생을 다한 것이다. 그로써 족한 것이다. 그 동안 짧지도 않은 세월 견디고 버티느라 고생 참 많았다. 그래서 더욱 고맙다.
자식을 포함한 내 가족 구성원, 친인척, 친구들에게도 그러한 기대는 순수한 관심이나 사랑이라기보다 탐욕, 집착, 소유, 과시로 변질될 수 있다. 참 조심해야 한다. 나는 그러한 사례를 주변에서 아직도 많이 보고 있다. 2023.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