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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청춘보고서 3, 대기병, 취사반 사역병,부조리 상황극

청솔고개 2025. 4. 20. 00:10

   청솔고개

   내무반 대기 후 첫 면담이 있었다. 첫날은 이렇게 어영부영 보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인사계 상사와 나의 보직에 대해 면담하였다. 교사 출신이고 하니, 행정반 교육계 일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교육장교가 넌지시 의향을 타진해 왔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일개 사단에 티·오가 서넛밖에 안 되는 희소 주특기는 십중팔구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한다는 제2훈련소부터의 풍설이 낭설이 아님을 확인하는가 싶다.

   나는 그 부당함을 항의했다. 통신학교에서 10주 이상 국비를 들여서 양성한 특수 보직 자원을 부대의 편의를 위해 일방적으로 다른 직(職)으로 보(補)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의 주장이 전입 이등병치고는 당돌하다고 부대의 인사 행정장교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서 나보고 일단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 후 나는 취사반 보조 사역병으로 한 달을 보냈다. 취사반 일로 하루하루는 잘 흘러가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본부행정반 교육계에서 같이 일하자는 요청이 그 후 몇 차례 있었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 부당한 인사에 대해 해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 부당함을 용인할 수 없었다. 쫄따구 이등병이 인사의 부당함에 항의한대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너무나 명백한 부당 인사처리였기 때문에 좌시할 수는 없었다.

   며칠 후 느닷없이 나보고 연병장을 돌라는 인사계의 명이 떨어졌다. 강압적인 처사였다. 내가 인사 명령을 순순히 수용하지 않은 데 대한 얼차려였다. 보복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나는 연병장을 무작정 돌고 또 돌았었다. 점심시간이 됐다. 본부 행정병 선임들이 나를 보고 “ㅊ이병, 점심은 먹어야지!” 하면서 같이 취사반으로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를 딱하게 여긴 나머지 베푼 배려였다. 나는 그냥 따라갔다. 식사 하고 내려오니 또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구 명을 받아 연병장을 이탈하고 식사하러 갔느냐는 것이다.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라나.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편, 육군 통신학교 출신으로 나와 함께 전입한, ㅅ아무개는 진작부터 사진반 근무처에 명 받아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본부에 대기병으로 남아 있고 그는 어떻게 주특기를 찾아 먹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내 자리는 더 늦게 온 어떤 신병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신병을 위해 나의 자리를 비워둔 것 같았다. 소문에는 그 신병은 이른바 사회 주특기 소유자라나. 입대 전에 직업적으로 사진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다고 그를 보했다는 것이다. 열불이 났다. 하지만 내가 딱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심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단 교육대에서 첫날 나를 데리고 온 박 아무개 상병이 이런 나의 상황을 지켜보더니 인사계에 청원해서 자기 밑에 조수 자리를 만들어볼 테니 같이 일하자고 제안해 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바, 같은 교직 출신인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결국 타협했고 수락했다. 나의 군 생활은 처음부터 이렇게 비틀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중등학교 국어과 교원으로 임용돼서 1년 4개월 동안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 휴직 후 입대했다. 또래와 비교하면 3년 늦게 군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나는 교사 임용, 입대 휴직 과정 등 공조직 인사 장본인으로서의 최소한의 경험이 있었다. 군조직이 보안상 폐쇄적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처사는 명백히 원칙에 위배됐다. 내가 당시 사병의 보직에 관한 규정을 자세히 살펴본 바는 아니었지만, 이는 상식적으로 판단해 볼 문제였다.

   8.15광복 직후에서 다년간은 우리 군이 직업교육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당시 국민학교 학력이 대부분이었을 때였다. 마을의 형뻘 되는 몇몇 사람들의 경우를 통하여 보았었다. 그들은 군에서 전역해서 운전직, 전기 통신을 비롯한 각종 기술직, 생산직 등에 진출했었다. 당시는 군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이 전역 후 사회생활에서 인적자원으로 광범위하게 쓰인 것이다. 군에서의 교육훈련과 실무가 사회에서의 직업적 기반이 되었었다.

   나는 그 주특기대로 보직될 될 때를 대비해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사단 사진병으로서 엘 나인틴 경비행기 탑승 하고 휴전선 부근 항공촬영이나 사단의 중요한 행사 사진 촬영, 각종 사건 사고 현장 사진 촬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진 기술은 물론 사진 기자라는 새로운 직업적 지평을 넓힐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인생 경험의 지평을 넓히려고 하는 꿈도 날아갔다. 군에서의 첫출발은 생뚱맞은 상황이었다. 나는 이것이 군조직의 보편적 생리라는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조리 상황극이었다.     2025.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