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앞의 글에서 지난여름, 가을, 겨울을 재활 병원에서 보내고 있으니 불현듯 48년 전 여름이 떠 오른다고 했었다. 내 생애에서 그 시절, 내 스물다섯은 치열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가슴앓이 트라우마가 있었던 나는 의도적으로 그 시절을 스스로의 담금질로 보냈던 것 같다. 다섯이나 사망했다는 그해 여름 폭염 훈련의 순간순간 나의 끈기, 견딜심, 연단이라는 독기를 품었기 때문이다.
그해 한여름 육군 제2훈련소 병 기본 훈련 6주에 이어 10주 후반기 주특기 교육을 마치고 나니 10월 말이 다됐다. 후반기 육군통신학교 교육을 마치고 배출되는 시점이 다가오니 어디에 배치되느냐 하는 것이 교육생 모두 초미의 관심사였다.
각자 이동할 짐을 싸고 나서 배치 부대 발표를 기다리는 시간은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만큼이나 긴장됐다. 교육생들의 관심은 후방이냐, 전방이냐 하는 것이었다. 후방 배치는 명령부대 부임하기 전에 잠시 집에 다녀 올 수 있는 특전 아닌 특전이 있다는 게 메리트였다. 후방 근무는 특박[特別外泊]이나 휴가 기회가 많아서 아무래도 자주 집에 한 번이라도 더 다녀올 수 있다는 점도 있다. 북행 병력 수송 열차를 타면 당연히 전방 근무이고 개인 출발은 후방 근무였다. 명령부대로 개인 출발하면서 짬을 내서 하룻밤 정도 집에 다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아무도 집에 다녀오지 못했다. 모두가 바라는 바는 집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었으리라.
배치 하루 전 저녁 식사 후 9시 지나서 군번과 관등성명을 호명하면서 한 사람씩 충지를 발표했다. 충지(充指)는 충원지시(充員指示)의 준말이다. 근무 명령한다는 뜻이다. 나의 충지는 제3보충대였다. 처음 들어보는 부대다. 군 생활은 근무지 배치에 따라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충지가 여기를 기점으로 북인지, 남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누가 그건 전방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부대명이 없으면 모두 북쪽이라고. 전방이라는 뜻이다. 이건 전반기 교육훈련 때 많이 들었던 얘기다. 나 같이 1개 사단에 3명 정도밖에 안 되는 희귀 주특기 요원은 전방으로 가기가 쉽다고. 전방이 군부대 밀집 지역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더플백을 꾸려서 북행 열차 탑승자들은 함께 육군통신학교를 떠나 대전역으로 향했다. 대전서 서울 용산까지 병력 수송열차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병력 수송 열차에 오르니 남쪽 지방 각종 후반기교육기관에서 배출된 병사들 가득 타고 있었다. **공병학교, **행정학교, 광주 ** 학교, 어디 ** 학교 등등, 이런 식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기가 배출된 학교의 교가를 떼창하고 있었다. 모두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참으로 진기한 풍경이었다. 이 수송 열차를 타면 최소한 현 지점보다는 더 북쪽으로 옮겨진 곳이 임지임을 다 알고 있어서 행여나 그런 임지에 대한 두려움이 부정적 편견을 떨쳐주려는 호송병들의 독려 때문인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도 목청을 높여 육군통신학교 교가를 불러댔다. 놀랍게도 미지에 근무할 전방부대에 대한 악명 높은 편견은 다소 가시는 것 같았다. 밤새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 용산이었다. 다시 춘천역까지 이동했다. 춘천역에서 내려서 안락한 군용버스를 타고 1차 집결지인 제3보충대로 이동했다. 늦가을이라 호반의 도시 춘천답게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제3보충대에서는 통신학교보다 더 자유로웠다. 3일 정도 머물었다. 군의 인력수급 계획에 따라 각 사단이나 여단의 보충대로 배정받는 것이다. 이 집결지 생활은 그냥 거쳐 가는 숙박시설이다. 우리 보충병들은 오전 내내 자욱한 안개를 벗하며 앞으로의 군 생활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소문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근처에는 중국집도 있어서 점심은 자장면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앞으로의 3년 군 생활은 치밀한 기계의 부품처럼 롯트 번호에 따라 공급된다. 우리는 이렇게 짙은 안개 속을 헤집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에 불과할 정도로 무력함을 느꼈었다. "팔려간다."는 말이 실감났다.
드디어 사흘째 되는 날, 나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육군****부대' 이름으로 명령이 날 줄 알았었는데 '**리' 등 행정 지명으로 발표되는 게 특이했다.
사흘째 날, 나를 비롯한 몇이 **리로 출발했다. 우리는 군용버스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팔려 간다."라고 자조하면서. 부대 근처 민가가 즐비한 길을 거쳐 안개를 뚫고 어딘가로 제법 달린다. 호반 도시 춘천의 짙은 가을 안개처럼 우리의 향방도 가늠이 안 된다. 우리는 커다란 못 둑에 다다랐다. 그 너머로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같은 물길이 보였다. 소양호라고 했다. 선착장에 내렸다. 멀리 양안에는 단풍이 붉게 타고 있었다. 그 단풍이 호면에 어리비치었다.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여기서 이런 최고의 가을 풍광을 보게 될 줄이야. 옛말에 '길 가다가는 중도 만나고 소도 만난다'는 말이 있다. "소양강 처녀"라는 노래를 통해 일찍이 소양강은 들어본 바 있었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었다.
우리를 이송하는 배는 외관이 투박하고 시커맸다. 장갑차를 물에 띄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호송병은 군기를 잡는다고 큰소리로 몰아친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호수 양안을 두리번거린다. 나는 이 뜻밖의 눈 호강 횡재에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배 밑바닥 좌석에 부동자세로 앉아있다. 가끔가다 떨어지는 불호령에 부동자세를 가다듬곤 하지만 곧 무디어진다. 나는 양안의 가을 단풍 경치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분위기가 좀 누그러진 낌새를 알아채고 나는 호송병의 눈을 피해 살짝 일어나 좁은 창문을 통해서 바깥을 내다보다가 걸려버렸다. “이등병*** 주제에 빠져서....! 앉지 못해” 하면서 나를 보고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한 대 칠 태세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 벌떡 앉았다. 다시 정자세를 취했다.
내륙의 바다라고 불리는 소양호를 1시간 20분 정도 미끄러지듯 달렸다. 도대체 우리가 가는 곳이 어떤 지역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첩첩산중 강원도 골짜기에서 배를 타로 이동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누가 육로로 가면 4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울퉁불퉁하고 먼지가 풀풀 이는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이 됐다. 아무튼 1시간 여 펼쳐진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 강렬한 느낌이 평생 나에게 꽂히듯 남아 있다.
다른 선착장에 배를 댔다. 영문도 모르고 내렸다. 어딘지 모르겠다. 밭둑에는 추수 뒤끝이라 콩대와 고춧대가 쌓여 있고 군데군데에서는 이를 태우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푹신한 군용버스에 올랐다. 논일 밭일하는 농부들은 가을걷이 마무리에 골몰한다. 먼지 풀풀 날리는 군용버스 행렬이 일상인 듯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가을은 깊어가고 날은 저물어간다. 고향의 농사철에 비해 여기는 한 달 차이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지와 연기가 풀풀 날리는 그 늦가을 산야는 내 생애 가장 황량한 것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늦게 *사단 신병교육대에 도착해서 고단한 짐을 풀었다. 여기가 제3보충대에서 호송병의 고함과 함께 팻말에 쓰인 “**리”인가 싶었다.
잠자리에 드는데 문득 게오르기우의 ‘25시’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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