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별은 밤하늘이 어두워져야 빛이 나는 법이다. 암울하다고 여겨질 때 더욱 빛났었던 내 청춘의 순간들이었음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입대 첫해 겨울나기 과정은 내 생애 특이한 체험이었다. 특히 전방 부대에서는 월동 준비를 교육 훈련 및 작전 이상으로 중요시했었다. “겨울을 잘 버텨야 한다.” 이는 군 전력의 유지와 직결되는 것이다. 폭설과 동파, 이로 인한 각종 안전사고 예방으로 월동기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11월 중순이다. 행정반 선임병들이 이번 주말에는 월동 준비하러 부대 뒷산에 오른다고 했다. 1차 월동 준비는 화목 채취다. 선임병의 인솔로 천2백 미터 가까이 되는 사명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산꼭대기서 사방을 둘러보니 남북으로 펼쳐진 새파란 물결이 겨울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선임병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남동쪽으로는 소양호, 서쪽으로는 파로호라 했다. 나는 ‘바로 여기다’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만큼 높은 곳에 올라왔으니 더 멀리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고향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눈을 부릅떠봤다. 조국의 대지 산하는 끝 간 데가 없어 보였다. 고향의 그림자도 물론 보일 리 없었다. 안 보인다. 그러자 불현듯, 맘속으로부터 뭔가가 치밀어오른다. 강렬한 향수(鄕愁)다. 미칠 것만 같았다. 고향 땅과 그 고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진다. 보고 싶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절대 고립 상황으로 쌓였던 강렬한 감성은 오갔던 많은 서신으로 해소하곤 했었다.
나의 향수병[homesickness]과는 아랑곳없이 선임병들은 따스한 겨울나기를 위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야생과 같은 야전에서 살아남기다. 미리 준비해 간 곡괭이로 마른나무를 패기 시작한다. 뿌리째 뽑힌다. 톱과 도끼로는 나뭇가지를 자른다. 능숙한 솜씨들이다. 도구가 없는 후임들은 나무 둥치와 가지를 모으기 시작한다. 굵은 것은 서까래만 하다. 잔 것은 따로 묶는다. 화목 채취 작업이 끝나자 묶은 것을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뜨린다. 가파른 아래로 밀어 내린다. 장애물을 피해 잘도 굴려 내린다. 화목 운반은 많이 해본 솜씨다. 작업이 신난다.
우리는 화목 둥치를 뒤따라 내려간다. 미리 준비해 간 비료 포대기를 엉덩이에 깔고 미끄럼탄다. 눈설매 타는 재미보다 더 스릴이 있었다. 나뭇단이 중간에 걸리거나 평평한 곳에 멈추면 다시 가파른 곳까지 끌어내 굴러 떨어뜨린다. 이런 채취와 운반 방식은 누대로 전수된 듯하다. 야전 사단의 야생 생존법이다. 아래에 내려와서는 나뭇단 하나씩을 둘러매고 개선장군인 양 의기양양하게 부대로 향했다. 그때 사진병을 만나 흑백 사진 몇 장을 남겼다. 사진에는 물이 빠져 누더기같이 얼룩덜룩해진 작업복과 천으로 된 작업화가 고스란히 백이었다. 지금의 눈높이로 본다면 얼핏 부랑자 집단으로 오해할 만도 했을 것이다. 이 나뭇단들은 삼동 겨우내 페치카 불쏘시개로 내무반을 덥히는 데 매우 소중하게 쓰였음은 물론이다.
나는 사명산 정상에서 느꼈던 그날의 ‘아득함’을 군 생활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더 어린 시절 국민학교에서 함께 불렀던 노래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가 그때처럼 절실하게 내 가슴에 다가온 적은 없었다. 소양호, 파로호 그 너머 어디메쯤 있을 법한 남쪽 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미지의 어떤 대상을 향한 ‘아득함’으로 이어졌다. 3년 군 생활을 견디게 하는 마음의 힘이 되었었다.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고개 너머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날리며/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윤석중 작사 한용희 작곡 “고향땅”> 2025.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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