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쫄병으로 자대 배치 이후 첫 겨울을 힘겹게 보냈다. 야전 부대의 겨울나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처구니없이 ‘이[蝨] 소동’이었다.
당시 이가 창궐하여 모포 솔기에는 굼실굼실할 정도였다. 병사들은 아주 어린 시절 한때 각자의 가정에서 목격하였다가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사라진 기생충으로 기억되던 존재였다. 내 어린 시절에도 우리 어머니가 우리 5남매를 키우면서 겨울마다 내복에 붙은 이를 컴컴한 등잔불 밑에서 잡아서 두 손톱을 포개서 으깨던 기억이 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던 기억도 있다. 그 후 위생 상태가 좋아지고 더구나 연탄을 때기 시작하면서 박멸돼 자취를 감추었던 이 떼를 군에 들어와서 구경할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으랴.
이투성이 모포를 당장 어찌하는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부대에서는 이 박멸 운동을 전개했다. 주말을 기해 부대의 모든 모포를 세게 턴 다음 한데 아카시아 울타리에 사흘 밤낮을 걸어 두게 했다. 밤에는 최소한 영하 10도는 오르내리는 혹한기였다. 이제는 다 얼어 죽었거니 하고 다시 모포를 털어서 사용해 보았다. 모두 안심했는데 그 이 떼의 태반이 다시 회생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피를 빨아서 배가 통통한 이가 굼실굼실 움직이는 모습이란 징그럽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얼어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로 있다가 다시 사람의 온기에 가두어지니 되살아난 것이다. 성충은 다시 새가리를 까고 하는 등 겨우 내내 그 기세를 넓혀갔다.
부대 내무반에서 이 떼와의 전쟁은 치열했다. 병사들 동내의 사타구니 부분에 디디티(DDT) 가루를 담은 자그마한 이 주머니까지 달라고 하는 지침까지 내려졌다. 일석점호 때, 이 주머니를 확인할 정도였는데도 이의 괴롭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미물 중의 미물인 이의 생명력의 끈질김에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다. 슬견설(蝨犬說)이 생각난다. 위키백과에서는 고려조 이규보의 이 수필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이 떼에 대한 동정심이니, 생명 존중 사상이니 하는 것들이 내게 고취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나'의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데, 이 손님은 어떤 불량배가 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그에게 전하며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전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이(蝨)를 잡아 화로에 태우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에 손님은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해 화를 내자, '나'는 개와 이가 비록 크기는 다르나 같은 생명체임을 들어 비유적으로, 달팽이의 뿔을 소의 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붕새(鵬)와 같게 보라고 전한다. [위키백과에서]
지금도 나는 3년 가까이 이어진 그때 군 생활에서 겨울철만 되면 딱 세 가지가 떠오른다. 아카시아 울타리에 빨래처럼 널어놓은 병사들의 겨울 내의에서 어쩌면 얼어 죽어서 떨어져 있을 이 떼들의 시체를, 눈을 부릅뜨고 확인하던 일, 병사들은 겨울 내내 목욕 한번 못하여서 손과 발이 터 갈라져 피가 철철 나던 일, 이 두 가지는 20여 년 전 아주 어렸을 적 이미 겪어보았던 일인데 새삼스레 군 생활에서 반복되어서 뭔가 씁쓸함을 안겨준다. 다른 하나는 페치카 당번 양 상병의 모습이다. 그는 증기기관차의 화부 차림이다. 석탄 가루로 상의 포켓과 소매가 까맣게 맨질맨질한 채 내무반 식구들의 따스한 잠자리를 지키기 페치카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매일 철야 근무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페치카 당번은 겨울 동안 모든 훈련, 작업에 열외시켜주는 특전은 있었다.
다음 해 봄이 왔다. 겨우내 묵혀놓은 동내의나 속옷, 양말 빨래는 휴일을 맞아 부대 뒤 계곡에서 손빨래했다. 날이 좀 풀어지면 부대 뒤 계곡의 찬물로 몸도 씻었다. 찬물로 씻을 때는 몸이 얼얼하지만 씻고 나면 개운하기 짝이 없었다. 몸에 김이 모락모락 난다. 이렇게 겨울은 가고 봄을 맞이하였다.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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