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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이 빛나던 순간 4, ‘산악 훈련’ 1화

청솔고개 2025. 5. 23. 17:08

   청솔고개

   국방부 시계는 째깍째깍 잘도 돌아간다. 계절은 한여름에 접어들었다. 드디어 악명 높은 유격훈련의 시즌이 돌아왔다. 훈련은 기수별로 명령받은 대로 부대 부설 산악훈련장에서 이루어진다. 산악 훈련 일정이 결정되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하면 발을 부르트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데 온갖 노하우가 다 동원된다. 비누를 깎아서 군화 깔창 위에 넣는다든지, 아니면 솔잎을 넣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가장 큰 공포는 설악산 장수대에 있는 사단 산악훈련장까지 15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데 그 철야 행군에 발바닥이 까져서 극심한 통증을 겪는 일이다. 이때만큼은 부대 전체는 선임 후임 구분하지 않고 출정하는 대원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한다는 분위기로 넘쳐흐른다. 이런 미덕, 동지애, 혹은 전우애라고 하는 감정에 그때만큼 흠뻑 빠져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드디어 출정이다. 8월 9일 오후. 한여름이다. 이번 산악 훈련을 명령받은 사단 직할부대에서 병사들이 사단 교육대에서 집결하여 오후 5시에 출발한다. 50분 걷고 10분 쉬는 행군을 밤새워서 아침 시간까지 계속한다. 잠을 자지 않고 밤새 걷는다는 것은 초인의 인내력과 체력을 필요로 한다.

   인제군으로 넘어가는 광치령 고갯길에 도착했다. 여기가 산악훈련장까지 절반에 해당한다. 벌써 한밤이다. 이 비포장 고갯길은 달팽이 속처럼 나선형으로 돼 있다. 고불고불 돌아 올라가는 지겹고 힘든 길이다. 병사들이 행군하다가 아무 데나, 길가에나 드러누워 10분 쉬는 시간은 천국이다. 50분 걷는 시간은 지옥이었다. 그 지옥은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고행길이었다. 행군은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고통의 끝판왕이었다.

   급기야 피로와 고통, 수면욕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몇몇 병사들은 민가에 들어가서 옥수수로 빚은 진땡이라고 하는 강원도 토속주를 사서 마신 사고가 발생했다. 그들은 극한의 피로감과 독주에 취해 그냥 광치령 고갯길 가에서 널브러져 자다가 낙오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심지어 총기까지 분실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특히 총기 분실 병사에게는 진상조사가 이루어진 후 응분의 징계 처분이 가해졌다는 뒷얘기도 들려왔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1950년 가을에 6.25에 참전해서 북으로 진격하다가 1951년 1.4 후퇴를 맞닥뜨렸다. 그때 하룻저녁에 100리를 달려서 후퇴했다는 아버지의 참전담이 떠올랐다. 이건 아버지처럼 실전이 아니고 훈련이라는 게 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힘을 냈다. 전쟁 상황을 가상하면서 나는 이렇게 극한과 실존을 체험한다는 신념과 용기가 생겨났다. 한여름 한밤중, 땀에 절인 얼굴과 팔뚝에 달려드는 모기를 쫓아내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면 없었지, 아버지처럼 몇 날 며칠 동안 군화 한 번 벗어 보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발에는 습기가 차고 동상이 걸리는 극한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 극기해 나갔다. 아버지는 한겨울 설악산을 넘다가 눈이 새하얗게 덮인 벌판에 반사된 햇빛이 눈에 과하게 작용해서 오는 설맹(雪盲)으로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눈물이 자꾸 나는 고생을 평생 겪으셨다. 아버지는 그 후 횡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시고 원주 야전병원에서 응급처치 후 부산까지 후송돼 부상 치료를 받으셨다. 아버지의 그 고난에 비하면 나는 이 상황은 전쟁놀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훈련 제2일째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비몽사몽 상태, 마치 몽유병자 같은 걸음걸이였다. 옳은 정신으로 산악훈련장까지 도달한 병사는 몇 안 돼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그냥 자리 깔고 큰대자로 뻗어서 오후 2시까지 휴식과 취침,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오후에는 숙영지를 조성한다. 배낭에 넣어 온 군용 A텐트를 꺼내 쳤다.

   아래 숙영지에서 장수대 산악훈련장의 위용을 쳐다봤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평평한 PT훈련장, 가까이는 줄 잡고 물구덩이 건너기 등 장애물 극복, 등반코스, 멀리는 두 줄 타기, 외줄타기 구조물이 마치 서커스 장내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저 많은 코스를 다 통과해야 한다. 그 악명 높은 장수대 산악훈련장의 모든 코스를 섭렵하는 거다.

   우리는 산 아래 숙영지에서 텐트를 치면서 여유를 부리는 것 같지만 악명 높은 산악훈련장의 위용을 멀리서나마 바라다보니 앞이 캄캄했다. 그러면서도 내면에는 내 앞의 도전과제를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가슴이 뛰었다. 첫날은 이렇게 오전까지 취침하면서 푹 쉬었다. 오후 늦게 숙영지 구축으로 끝이 났다.

   저녁에 A텐트에서 잠을 자는데 8월 10일경이지만 산속 고지대라 벌써 가을 기운이 느껴지며 춥기까지 했다. 온몸이 땀에 절여져 근질근질하기도 하고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밤새운 피로감으로 모두 잠에 골아떨어졌다. 곳곳이 코 고는 소리가 스테레오를 이룬다.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2025.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