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고대하던 첫 휴가 명령이 떨어졌다. 군복도 새것으로 준비하고 군화도 반질반질 닦아서 걸어두었다.
1977년 4월 1일, 부대장에게 휴가 신고를 마친 후 첫 휴가를 출발했다. 봄풀이 파릇파릇하였다. 내 마음은 이미 고향 앞으로 가 있었다. 그간의 지독한 향수병 치유에 대한 기대로 마음은 더욱 부풀어 올랐었다. 소양호 도선장에 도착해서 배표를 사서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생겼다. 도선장 초소를 지키고 있던 헌병 하나가 나를 불러세웠다. 휴가병 복장 점검한다는 것이다. 아래위를 죽 훑어보더니 비표인지 뭔가가 잘못됐다나. 복장 위반으로 군 풍기 적발을 해야겠다고 한다. 이미 두 번째 휴가로 동행하던 선임병이 나보고 드디어 우려하던 올 게 온 것 같은데 이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 당하는 경우라 어떡하면 좋을지 되물었다. 그는 재수 더럽게 걸렸다고 했다. 이럴 경우 급행료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안 그러면 휴가 기분은 기분대로 다 잡치고 그 이후 처분이 떨어질 때까지 마음이 찜찜해서 못 견딜 것이라고 했다.
이 도선장 삥땅 사례는 당시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것이었다고 그 선임병은 말했다. 특히 나처럼 어수룩해 보이거나 만만히 보이는 첫 휴가 쫄병이 주된 타켓이 된다고 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대로 복장이나 두발 등에 트집 잡으면 고스란히 걸려든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부대에서 받은 휴가비를 몽땅 급행료로 삥땅 뜯겼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휴가비 4천 원인가를 몽땅 희사(喜捨)한 셈이다. 고향 집까지 여비는 휴가 동행 동료에게 빌렸다. 내 기분이 고약했다. 그냥 개기려고 하다가 그러면 25일 휴가 기간 내내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위수지역 이탈[휴가]통행료를 지불한 것이다. 노상강도가 따로 없다.
황당하고 참담한 마음을 안고 서울역까지 어찌어찌하여 도착했다. 고향까지 바로 이어지는 열차는 군용열차밖에 없었다. 일반열차를 타면 내일 아침 출발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장 군용열차는 타고 싶지 않았다. 고향앞으로 바로 가는 중앙선은 출발 시간이 맞지 않았다. 경부선은 동대구역까지 가는 열차가 있었다. 밤중에 동대구역에 내려서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갈아타도 가야 한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야 도착한다. 밤차를 탔다. 일단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이 시간만큼이라도 군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한민국 육군 일병 군복을 입은 나였지만 군복 입은 그림자만 봐도 기분이 팍 상하고 일단 피하고 싶어졌다. 특히 헌병 복장은 더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 시간을 가졌다. 생각도 가담듬어 본다. 지난 10개월 군 생활, 일병 계급장 딸 때까지의 모든 것...등.
한시적 사회 복귀는 나로하여금 모든 게 낯설고 신기해 보였다. 열차 안의 좌석, 그 좌석에 앉아서 여행하는 사람들, 그들의 복장, 그들의 대화, 그들의 짐보따리조차 모두가 새롭고 새삼스러웠다.
다음 날 새벽 마지막 터널을 지나자 정겨운 고향의 강너머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 내 고향.’ 헤세의 ‘귀향’처럼 동생들의 마중도, 하녀들의 반김도 없지만 나는 마냥 가슴이 설레고 부푼다. 고향을 떠나본 사람만이 고향의 소중함과 그리움을 알 수 있다. 나는 도선장 급행료 희사에 대한 불쾌한 기억도 그립고 정다운 고향 마을의 모습에 다 묻어버린다. 휴가 기간 25일 중 귀대에 하루 잡고 남은 23일을 잘 보내야 한다. 어떻게 보내야 잘 보냈다고 할 것인가?,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본다. 귀대하는 그 순간, 어떡하면 23일 보낸 나날이 후회 없는 나날로 남아 있도록 할까.
부대 출발해서 고향 도착까지 꼬박 24시간 걸린 셈이다.
그동안 고향 집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집 전화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 집이 이사한 것이 그것이다. 터미널에서 공중전화로 연락해서 대략 집의 위치를 설명 듣고 찾아갔다. 아침 식사를 차리시던 어미가 뛰쳐나오셨다. 내 손을 잡으시고“이게 누고? 큰 아 아이가!” 하신다. 내가 입대한 뒤로 어머니가 밤마다 큰 사발에 정한수 떠다 놓고 큰아들 무운장구, 무사 귀환을 비셨다는 사연은 여동생들의 편지로 이미 들은 바였다. 때로는 무심하신 척해도 우리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이시다. 혈육의 정으로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23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고향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삼촌 내외 등 친인척 방문, 친구 만남, 동생들과의 시간 보내기 등등. 주로 못 만났던 사람 만나기로 보낸 꿈결 같은 이십여 일이었다.
드디어 귀대 날짜가 내일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큰아들의 귀대를 앞두고 가지고 갈 음식 준비에 부산하셨다. 떡과 엿을 보따리보따리 푸짐하게 싸주셨다.
1977년 4월 25일 귀대하는 날이다. 새벽에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내가 모퉁이를 지나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셨다. 아버지께서 자전거로 터미널까지 태워주셨다. 첫차로 출발했다. 마음이 무겁다. 혹시 오늘 자칫해서 귀대시간 어길까 봐 부대까지 오는 데 마음 졸이기까지 했다. 이제 여기 들어가면 다음 휴가까지 혹은 제대할 때까지 최소한 1년은 집단생활에 묶여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지난 25일간 보냈던 자유로운 시간이 꿀처럼 달콤했다. ‘자유, 자유인’의 가치가 소중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위병소를 거쳐 부대 내무반 입구에 도착했다. 부대 울타리 너머 마구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더욱 비감하고 청승맞게 느껴졌다. 밖에서 들으니 부대 내무반에서 점호 준비한다고 부산했다. ‘전달!’하는 구령 소리도 들렸다. 군내 특유의 그런 용어들이 너무 듣기 싫었다. 눈도 감고 귀도 막고 싶었다.
이미 내 마음은 알 수 없는 처연함과 처절함으로 점철돼 있었다. 이런 멘탈을 관리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미귀(未歸), 탈영(脫營)이란 군무이탈(軍務離脫)로까지 치닫는가 보다. 3월의 종달새 노랫소리에서 4월의 개구리 울음소리로 끝난 첫 휴가의 슬픈 전말이다. 2025. 5. 13.
'Now n He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청춘이 빛나던 순간 4, ‘산악 훈련’ 1화 (7) | 2025.05.23 |
---|---|
내 청춘이 빛나던 순간 3, ‘이[蝨] 떼 창궐 소동' (1) | 2025.05.21 |
내 청춘이 빛나던 순간 1,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6) | 2025.05.12 |
나의 청춘보고서 4, 창고 업무, 공용외출 (2) | 2025.04.21 |
나의 청춘보고서 3, 대기병, 취사반 사역병,부조리 상황극 (5) | 2025.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