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야학(夜學) 전후사(前後史)(1/2)
청솔고개
내 나이 갓 스물에 나는 국립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감청색 대학생 교복과 학교 배지는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의 새로운 출발의 상징이었다. 대학 1학년의 나는 다시 중2 시절로 되돌아간 듯, 학문적 탐구의욕으로 나날이 내 의식이 충전되는 희열을 느꼈다.
시험 기간이 되면 하숙집에서 새벽에 일어나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공부에 몰두하였다. 특히 선택과목인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인류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탐구열은 그 후 나의 교직 생활과 연구 활동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 했다. 중1,2 시절 이래 제2의 열정적 탐구기라 할까. 그래서 모든 게 새로운 느낌이었다. 심리적으로 나날이 많은 게 안정되어 갔다.
당시 공안 정국에 대한 운동권 활동과 반체제 운동의 열기가 대학가를 풍미했었다. 그래도 그건 나를 학업, 학문의 열정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내 스스로가 아예 그런 데 기웃거릴 깜냥도 되지 않는다고 자각한 것도, 공무원 신분인 교사를 아버지로 둔 나의 입장도 한 원인이 되었다. 학과의 시작(詩作) 발표회에서 내 생애 최초로 내 시를 학우들 앞에서 발표하는 용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학과의 동인지 활동에도 열성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유치(幼稚) 찬란(燦爛)의 극에 달하고 얼굴이 화끈거림을 면치 못할 작품 수준이었지만 창작과 표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은 나를 또 다른 정신세계로 이끌어 갔다.
내 유소년시절의 막힘, 억울함, 분노, 암울함 같은 것을 창작 표현 활동으로 풀어나가려는 나의 당초 의도는 제법 제 궤도를 진입한 듯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 2학년 1학기 때, 엉뚱한 데에서 발생했다. 학교의 신체검사에서 내가 어떤 내과적 질환의 의심 증세가 진단되었다. 지도교수는 나를 불러서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건 모두들 꺼려하던 후진국 형 질병의 대명사였다. 아직은 경증이라서 좀 더 몇 달 두고 보자고 의사는 말했다.
그해 6월초 인근의 유명 사찰이 있는 산기슭에서 2학년 학과 단합 등반 야영대회가 1박 2일로 있었다. 담력 테스트 프로그램에서 파트너 여학생이 하소연하는 말 한마디가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그 여학생의 말인 즉, 지금 어떤 야간고등공민학교에 국어 강사를 구하지 못해서, 넉 달째 아이들이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수업을 나보고 좀 맡아 달라고 하는 간청이었다. 나는 결정하는 데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결국 그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결정과 그에 따른 변화가 결국 나의 대학생활과 이후의 대인관계, 인생관, 가치관 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은 그 후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충분히 절감할 수 있었다. 나의 청년 시절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다.
6월 중순 경, 비가 살살 뿌리는 어느 날 오후로 기억된다. 나는 그 여학생의 말만 듣고 길을 물어 가면서 혼자서 야학을 찾아 갔다. 도착하자마자 교무 담당하는 한 해 선배 되는 선임자가 나더러 한 시간 수업 결손이 급하다면서 바로 수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부탁할까 싶어서 눈 딱 감고 일단 무작정 아이들 앞에 섰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2교시 연속 수업으로 시간표가 짜여 있었다. 90분 수업을 마치고 나니 내가 뭘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허둥대고 헤매었을 뿐이었다. 난생 처음의 교단 등단이 교재에 대한 연구 하나 없이, 가르치는 데 대한 마음의 준비 하나 없이 결행됐으니 오죽하였겠는가. 땀이 온통 흘러내렸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이 일은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심신의 쇠약이 가져오는 부담감, 불안감은 오히려 오롯한 정신의 순수성을 더하게 했다. 그 야학에 봉사하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젊은이들과의 활발한 만남은 내 정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셈이다. 그 동안 보일 듯 말듯 희미해져가는 내 자존감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그 해 여름 나의 건강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한 것도 이렇게 회복된 역할과 존재감 덕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이후 여름 방학 때까지 확진을 위해서 일부러 내 몸을 혹사시켜 보았다. 의심 증세의 내 몸이 어떤 반응과 결과를 보이는지 알기 위해서다. 심지어 친구가 하던 가정교사일도 물려받아 생전 처음 해보았다. 야학 수업은 물론, 또 교회에서 벌이는 사업으로 BBS 구두닦이 학생 가르치는 일에도 참여하여 보았다. 내 몸을 일부러 학대해 본 것이다. 여름 방학 때 대학 병원에서 결국 확진을 받았다. 막상 그런 결과가 나오니 참담했다. 몸을 몇 달 동안 의도적으로 방치하다시피 했더니만 예상 대로였다. 가족들에게도 알렸다. 몇 잔 못하던 술도 거의 끊고 일상 활동도 크게 위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체험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그때 야학 활동의 역사를 기록한 문집 ‘**** 50년사’에 내가 투고한 글에 잘 나타나 있음. 다음 회에는 '나의 야학(夜學) 전후사(前後史)' (2/2)가 이어짐]
2020.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