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40년 전 그날 기록2
-[나의 ‘인연’2]로 2020.5.17.의 [나의 ‘인연’1]에 이어진 글임
청솔고개
이제 그 아이와 편지나 대화, 만남이 단절된 이유를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 왜 더 이상 소통이 안 되었을까.
지금 찬찬히 생각해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거기에는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을 간절함 절실함이 있었다. 그 어떤 아픔, 외로움, 치미는 그리움의 실체는 또 무엇이었는가.
1980년도 7월 초, 아이가 보내온 마지막 편지의 행간을 읽어보았다. 그 후 아이와의 첫 만남이 곧 마지막 만남이 된, 단 한 번의 만남과 동시에 이루어진 결별에 대한 과정이 일기에 소상히 남아 있다.
다음은 그 때의 나의 복잡한 심중이 그려진 나의 일기 중 일부이다. 거의 횡설수설, 정서와 의식의 분열 현상 같다. 좋게 말하면 자동기술법이랄까. 지금은 이것을 좀 해석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 마음을 남겼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정이 그렇게 복잡해져 버린 데 대한 원인을 조금은 알 듯하다.
이와 관련된, 앞으로 이어서 나올 나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다.
여태까지는 그 아이에 대한 당시의 나의 상념과 그 아이의 편지 내용은 나름대로 소중하기 때문에 혼자 간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중한 만큼 서로 공유, 공감할 시점에 이르렀더고 생각한다. 내 생애를 한 바늘 한 바늘 기워 나가는 이 시점에서 이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 물론 한 하늘 아래 어디에라도 있을 그 아이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이해 줄 것으로 믿는다.
80. 7.3. 목. 흐림.
(~전략) 그런데 왜 술만 취하면 우스꽝스럽게 되고 수채에 발을 빠진다거나 혹은 눈물이 흘러 딱딱한 침대를 적시는지. 그리하여 보고 싶다. 흘러간 것이니까…….
잠에 취하지 말자. 잠을 즐기지 말자. 극복하자. 보고 싶다, 아이가 이제는. 일시적인 감정은 아닐 거야……. 한 번은 만나봐야지. 나를 불면케 한 소녀이므로. 그래 소녀라고 하는 편이 더 좋다. 소년이 좋은 것처럼. 나도 이제 청년 시절도 다 지나갈 시기. 이다지 덧없이. (후략~)
80. 7.10. 목. 흐림.
예기치 않았던, 아이한테서 소포와 편지가 왔다. 차가울 정도로 변신한 그 아이의 모습. 그러나 만나야 한다. 새벽 4시에 잠이 깨어서 편지를 썼다. 두 시간에 겨우 한 면. 할 말이 많은데 정작 할 말은 적다. 아무것도 없다. “위험한 지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만나야 한다. 불망의 그 아이 모습이라도 보아야 한다. 그 책을 다 보아야 한다고. 무척 무리한 주문이다. 내 영혼의 질량만큼이나 종요로운 그 아이의 모습. 문득 또다시 그 아이의 모습을 바라본다. 둥근 선의 얼굴, 단정한 이마, 좁은 입술……. 5년 만의 해후가 이런 식으로. 내가 가서 그 아이한테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그 아이를 참다운 의미에서 구원해야 하나. 내게 도움을 주겠다고. 참 당돌한 얘기다.
“하루도 나의 기억에서 멀어진 적이 없는 나의 선생님께
그 숱한 갈등과 모든 것들로부터 버림 받은 듯한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을 허덕이며 그 가을과 겨울 그리고 바람 부는 봄을 보냈읍니다. 내가 어떻게 그 고통 속에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힘겨운 시련이었다고 할까요…….” (후략)
뭣이 이 작은 아이로 하여금 이토록 고통케 했나. '재생의 날'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이 작은 아이의 가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영원히 환상이라고 접어둘 걸. 아름다운 무지개꿈이라고 접어둘걸. 왜 잊지 못해 연연하나…….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선율이 눈물처럼 정겹다. 지금은 새벽 두 시. 하루라도 내 기억에 멀어진 적이 없는 감나무. 그 두꺼운 잎에 튀기는 빗물 소리. 밤을 지킨다. 문득 장짓문을 열고 그 빗소리를 더욱 확인해 본다. 저만치 대웅전(大雄殿)에 켜진 촛불이 희미하게 창호지에 비친다. 이 적요함이란. 그래 달려가자. 가서 가슴을 헤치고 실컷 얘기하자. 보고 싶었다고 그리워했다고 왜 말 못하나. 무엇이……. 체면, 위신……. 야윈 얼굴을 확인해 보자.
한 조각 거울을 통해 내 존재의 잔주름. 그 피로한 자국. 박인희의 '아사달'이 흘러나온다. 이 짧은 생애에서 무엇을 주저하고 가슴 숨기나. 위로받을 생각일랑 버리자.
축구를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입에 거품이 나고 쥐가 날 때까지 경련으로 쓰러질 때까지. 졌다, 무참히도. 통한해 주는 이 없이. 목욕 갔다. 현동 냇가. 잉어처럼 헤엄도 쳤다. 동심으로 돌아갔다. ㅎ을 위로하기 위한 모임. 그래 열심히 살자. 결코 쓰러지지 말고. ㄱ씨의 새로운 면모. 살자. 함께 웃으면서 혹은 울면서
통금이 지난 후 다니는 쾌감과 긴장감, 모험. 맨발로 우중을 뛰었지. 땀과 빗물로 범벅된 하루. 이 순간 얼굴과 몸.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 생존의 처절함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그래서 이렇게 책상과 홀로 대면하면 또다시 그 아이 생각. 어차피 한 줌 허망한 바람이거늘 왜 이리 위안 받으려하나. 그 심장 약한 아이한테서…….
아이야, 이제 피로한 얼굴은 내게 보이지 말아다오. 너는 이제 스무 살, 꽃피는 나이. 그래 의상실에서 일한다고. 그 복잡한 도회의 한 복판에서 피로를 모르면서.
ㅎ씨의 투혼이 부럽다…….
“~지구”를 보아야지. 간절한 네 소망인데.
2020.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