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나의 40년 전 그날 기록 3/나의 ‘인연’이다. ㅎ, 그 아이는 나에게는 또 다른 이름의 ‘아사코’인가

청솔고개 2020. 7. 15. 20:20

나의 40년 전 그날 기록 3 

                                              청솔고개

-[나의 ‘인연’3]으로 2020.7.10.의 [나의 ‘인연’2]에 이어진 글임

    다음은 1980년 7월 13일자로 '내 생애 기움'에 기록돼 있는 내용을 줄인 것이다.

   ㄷ시에 있는 ㅋ이라고 기록돼 있는 의상실. 그 아이가 일하는 곳이다. 그 앞에서 만났다. 아이는 아주 연약해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 아이가 나가는 교회에 같이 갔다. 거기서 그 전에 소포로 부쳐온 책과 비슷한 교회의 교리 관련 책을 하나 받았다. 아이한테 그 교회의 교리에 대한 것을 집중적으로 물어보았다. 나로서는 별로 수긍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이에게 내가 억지로 큰 흥미를 표출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이어서 2시간 동안 어떤 젊은 연사의 설교를 들었다. 아이가 그 연사도 교사라고 했다. 관심도 없었으니 이해도 안 되었다. 이런 상황에 나와 아이가 들어 있다는 게 온통 부담되고 당혹하기만 했다. 예배가 끝났다. 우리는 교회에서 나와서 같이 걸었다. 처음 그 아이와의 동행이다. 식사를 하려고 중국집에 들어갔다. 아이는 유동식을 한다면서 아무거나 못 먹는다고 했다. 4년 만의 첫 만남이다. 아이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회인, 나는 제대 복직한 직업인 교사로 만났는데, 아이와 같이 식사 한 끼 같이 못했다. 아이가 나한테 “8월초에 서울 집회가 있는데 같이 가셔야 된다.”고 선언 하듯이 말한다. 일반집회는 초보자보다 구원받은 자 위주로 진행하기 때문에 잘 이해가 안 되니, 서울 집회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확답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게 아직 잘 이해가 안 되니 네가 주는 책이라도 천천히 읽어보마.”라고 답했다. 여지는 좀 남겨 두었다. 식당에서 나와서 함께 좀 걸었다. 아이와 어느 파출소 근처에서 헤어졌다. 그 때 아이가 쪽지 하나를 전해 주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인근 도시에 있는 ‘ㅎ의 집’에 꼭 나가 달라고 했다. 아마 교회 지부 같았다. 이것이 아이와 마지막이었다.

    다음은 1980년 7월 13일자로 나의 일기장에 기록돼 있는 그 아이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집회 전에 연락드릴게요. 방학 전으로요” 아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그래, 그전에라도 한 번 찾아올게. 조용히 좀 이야기 하자. 참, 몸이 그래서 안 됐다. 건강에 유의하렴. 특히 몸조리도 좀 하고” 아이는 총총걸음 ㅋ의상실로 들어갔다. 나는 사라지는 그 아이의 핑크빛 스커트와 노란 블라우스를 바라다보았다. 숱한 인파와 제각기 바쁜 틈서리로……. 나는 (5시간도 더 걸리는 근무지로) 돌아왔다. 오는 길은 비가 오고 있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솜처럼 젖어 뭉개지는 내 몸뚱이……. 나는 지금도 그날, 그 순간이 생각난다. 그리고 미진함, 아쉬움 같은 게 하나 있다. 교회 집회에 나가달라는 것 외에 다른 무슨 간절함 하나쯤은 더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서로 숨기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믿고 싶다. 왜냐하면 거의 4년 동안 자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거기서 그때 그 아이가 그렇게 나올 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지금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확 달라질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냥 그대로 헤어져 버린 것. 그 이후는 내 기억 속에는 더 이상 그 아이가 없다. 아마도 내가 애써 내 기억에서 그 아이를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의식의 깊은 밑바닥에서. 그런데 이것이 지금에야 내가 가장 후회하는 행동이다. 마냥 회피만 하지 말고 한 번만이라도 더 만나든지 아니면 편지로 소통했어야 했다. 꼭 그리하였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세월이 지날수록 세차게 밀려오곤 했었다. 무엇인가. 가난, 환경 아니면 대학 진학의 좌절인가, 심성과 성향 중 무엇이 그 아이로 하여금 그렇게 확 바뀌도록 한 것인지 한 번쯤 다그쳐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었다. 지금에야 생각하니 그것이 또 회한(悔恨)으로 남는다. 끝까지 그 아이와 대화하고 토론하고 논쟁까지 해서라도 최선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인생의 멘토 역할을 내가 했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비겁하게 회피해 버렸던가 하는 자책감마저 든다. 더 이상 나는 아이를 안 들여다보려고만 하고 아이 본인의 강한 신념이 이미 그러한 나의 여지를 틀어막아버렸다고 너무나 쉽게 치부해 버린 것이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평생토록 마음공부를 하면서,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끝까지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조용히 지켜 주는 일을 나의 업으로 삼는 지금에야 그 사실이 깨달아진 것이다. 이제는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이 늦어버렸다.

    또다른 이유.

   물론 당시는, 나의 이십대 마지막 해, 나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나의 과중한 삶의 무게, 마음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었다. 나의 이십대 끝자락으로, 막바지로 쫓기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 스스로에게도 변명으로나마 통할까? 또 하나, 나는 이미 아득한 지난 날, 중3때부터 대학4년까지 그 아이가 겪었던 비슷한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이건 기막힌 우연이겠지만, 그 아이가 그렇게 빠져들었던 전철(前轍)을 일찍이 내가 밟아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그 아이의 그렇게 바뀐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더 힘겨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8년 동안 그 아이와 같은 그런 교회 생활에 빠져들어 그 길을 걸어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그러한 맞닥뜨림을 피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피천득님의 ‘인연’이 떠오른다. 그러자면 필경(畢竟), 나는 그 아이를 그 후, 다시 한 번 더 만났어야 된다고 자책하기보다는 애초 한 번도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문득 아이가 보낸 마지막 편지의 한 부분이 새삼 내 가슴을 저민다.

   “(~전략) 얼마 전만해도 저 역시 그러면서 무지개를 쫓아다니듯이 이리저리 무지개를 잡으려 했어요. 결국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오직 벌거벗은 나 자신을 몽땅 드러내 놓고 말이죠……. 벌거벗은 양심…….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양심으로부터 해방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찾은 적이 있나요……. 항상 선생님께서는 제 편에서 이해하고 또 늘 내편이었으니까요. 지금 이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생님께 얘기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랬던가요. 선생님, 그 동안 공백 기간이 길던가요.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저는 달라져서 선생님 앞에 나타난 거예요. 이렇게 홀연히 또 선생님께 저를 드러냈군요. 정말 너무너무 반가와요. 우리 악수할까요……. 선생님 도와드리고 싶어요. 저는 거짓말 같지만 아직 다방 출입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곳에서 선생님을 뵙고 싶지는 않아요……. 고된 하루하루지만 나는 나를 위해 육신을 위해 살아가지 않기를 노력하며 사려고 해요. 그래서 그만한 피로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어요…….”

   나의 ‘인연’이다. ㅎ, 그 아이는 나에게는 또 다른 이름의 ‘아사코’인가.  2020.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