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청솔고개
사람의 일생은 크고 작은 선택으로 점철돼 있다. 모든 게 선택이지만 딱 두 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태어남과 죽음이다. 죽음에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실감난다. 나의 고등학교 때는 나만의 고요한 ‘질풍과 노도’의 시절이었다. 고1시절에는 운 좋게 특수반에 소속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열심히 한 게 좀 남아서 고교 입학시험 결과가 특설반 편성 요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부자 망해도 삼 년 먹을 것은 있다.’는 거다. 문제는 2학년 올라가기 전, 인문계, 자연계 계열 선택에서부터 발생했다. 난 내 성향 상 당연히 인문계로 편성되어야한다고 몇 차례 진로 선택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당연히 인문계로 진급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 당국은 다 결정되었음직한 시점에 나보고 이런 제안과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자연계로 가는 게 어떠한가, 대학 진학이나 취업에도 유리하다면서 자연계로 가도록 자꾸 종용하는 것이었다. 대세로 보아 인문계는 제한된 직업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취직이 잘 안 된다, 또 된다하더라도 급여 등에서 자연계보다 현저히 처진다, 그러니 지금에라도 자연계를 가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면서 선뜻 응하지 않자 의사 타진 정도가 아니라 강권하는 듯했다. 결국 그 통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를 위해서 하는 말로 들렸었기 때문이다. 교과서도 한참 뒤에 받았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었다. 나중에 내가 교직에 들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인문, 자연 선택을 받아보면 그 인원수가 학교에서 기획하고 있는 반 편성 숫자에 딱 맞게 떨어지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학교 교사 수급 등 제반 조건에 맞추려면 억지로라도 조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현직에 들어와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2학년에 올라오자 나에게 학업보다 더 비중이 커진 인생과제가 생겼다. 당시 내가 다니던 신흥종교 교단 학생부의 포교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다. 이른 바 전도부장 직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교단 활동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물론 나의 성향도 작용했지만 자연계 과목 매 시간이 나에게 주는 학습 부담이 컸었다. 특히 수학, 과학에서 한층 심화된 ‘~Ⅱ’를 이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적성, 기존학력 등으로 봐서는 더 많은 노력과 집중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인문계 과목은 수업시간에만 잘 들어도 어느 정도 소화가 되었지만 자연계 과목은 더 본격적인 학습활동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Ⅱ’가 붙은 과목에는 학습 이해도가 점점 떨어져 갔다. 성취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과목 시간에는 졸기 일쑤였다.
나의 관심과 흥미는 서서히 다른 데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건 신흥 교단에서 맡은 나의 일이었다.
고 2년 1 학기가 지나고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나는 진학을 위한 보충수업에도 참여하지 않고 여름방학을 교단활동으로 보냈다.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데 나의 열정을 바치는 거다, 당시 나의 신념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그런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새 바뀐 반, 교실, 담임교사 통보였다. 이른바 자연계 특수반에서 보통 반으로 이동이었다. 아무리 학생들의 경쟁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학교 규정에 따른 처분이라고 했지만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처음에는 받아드릴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자존심도 많이 상했지만 피해가는 도리는 없었다. 좀 분하기도 했다. 반 소속도, 교실도, 담임교사도, 급우들도 마치 한 학년이 진급한 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은 결국 자업자득이라고 스스로 억지로 위로해 보긴 하였지만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되자 나는 2학기부터는 더욱 교단활동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포교활동 등 교단의 활동에 나의 고등학교 2,3년 시절을 오롯이 바친 것이다. 고3 진학 원서 낼 때 반전이 생겼다. 누가 보아도 나는 자연계 공부를 했으니 당연히 대학도 과학, 공업, 기술 계통의 자연계로 진학하는 게 순리였던 것이다. 내가 미미한 존재여서 그런지 학교 당국이나 주변에서 나의 진로, 진학에 대해서 제대로 상담을 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주 답답한 상황이었다.
원서 작성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같은 반에서 아주 친한 친구 하나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는 게 있었다. 자기 마을 3년 선배 하나가 지역의 국립사대 국어교육과를 다니고 있는데 졸업 후 진로 등 여러모로 보아 꽤 괜찮아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내 가슴으로 확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이 선택이다. 나는 나의 고교 시절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다. 이런 나의 청소년 시절을 언젠가는 어떻게든 시원하게 풀어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차 교사 되는 것보다도, 나는 그 학과의 ‘문학 작품의 창작, 작가 되는 것’과 관련된 것에 먼저 꽂혔다. 나의 이런 절실함을 실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학과를 선택했고 또 준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진학했다.
그 후 교직 생활 동안 나는 나의 고교 시절 겪은 것과 학교 현장의 실상을 대비해 보곤 했다.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가. 학교현장에서는 내가 고등학교 때 겪은 그런 상황이 자주 재연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걸 절대로 겪지 않도록 하기보다는 그런 상황이 불가피하다면 그 전후사정을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솔직히 터놓고 설득하면서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의 학습권 보장이고 그 실천인 것이다. 이런 신념을 이행하려고 노력해왔다. 아울러 학교는 어떤 이유로든지 상처받았음직한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서 따스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 마디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찌 보면 소박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의 교직 생활을 끌고 오려고 애썼다. 이제 그러한 나의 신념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주변에서 평가해 왔을 것이다. 나는 모교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다. 아니 기억하기 싫은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교사로 평생 생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애의 아이들에게는 7월은 언제나 어려운 시기였다. 여름이라는 학습의 계절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늘 이 장벽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었다. 오늘, 나도 힘겨운 이 7월을 넘어가려고 한다. 불현듯 무척 힘들어하던 내 생애의 아이들이 생각난다.
평생토록 나도, 다음 ‘7월의 시’에서 조향미님이 기다리던 '그런 선생님’을 기다려왔었다. 스스로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이 시는 아직까지 나의 학습 카페에 올라 있다. 이런 제하에, “언제나처럼, 처음처럼 교단에 직립하는 이 카페지기의 진솔한 마음입니다.”라고. 다 나의 선택이다. 다 나의 운명이다.
고향 같은 선생님
조향미
내게 고향 같은 선생님이 한 분 계셨으면
객지 어느 쓸쓸한 길모퉁이 돌다가
생업에 낯선 사람들에 시달리다가
문득 가슴으로 넘치는 안온함으로
떠올릴 수 있는 선생님
시외버스로 두어 시간이면
달려갈 수 있는 동네
사립문 활짝 열러 있고
늦도록 남폿불 내걸려 있는 집
그리운 흙냄새와 낯익은 풀꽃들
서리서리 벌레 울음도
가슴 가득 품고 계신 분
내게 그런 선생님 한 분 계셨으면
또한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선생님 되었으면 2020.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