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연’1
청솔고개
블로그에 올릴 나의 노래 ‘詩人의 노래’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40년도 더 전, 내게 한 아픔과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애제자 k가 나한테 보낸 편지가 눈에 띄었다. 그 와 관련된 내 일기의 기록도 찾아보았다.
내가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새내기 국어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은 곳은 같은 도에 속한 곳이지만 나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대학 소재지에서는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내 고향에서는 직통 교통편이 없는 곳이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무척 서툴고 외로웠다.
더군다나 교사 발령 2년 째, 난 군 입대 영장을 받고 6월 말 입대할 예정이었다. 물론 입대를 앞두고 담임은 맡지 않았다. 그 때 내가 교과를 담당했던 고 1생들에게는 난 열혈 청년교사였다. 나는 세련된 것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왕초보 교사 그 자체였다. 그런 만큼 수업은 물론 각종 아이들의 문예활동 지도에도 열정적이었다.
드디어 입대할 날짜가 내일 모레로 다가 왔다. 난 입대 바로 전 날, 학교를 떠나는 직전까지 수업을 5교시나 연달아 이어서 했다. 교사는 수업으로서 말하고 아이들은 수업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바로 다음 6교시에는 전교생이 집합되었다. 거기서 나는 입대 휴직 송별인사를 하였다. 천명이 넘는 전교생들이 운집해서 내 인사말하기 전, 후 두 차례나 우렁차게 입을 모아 “멸공(滅共)!”을 외쳤다. 구호와 함께 단체 경례까지 받았다. 새내기 청년교사에게는 최고의 예우였다. 나는 그때 무슨 내용의 인사말을 하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필경, 그런 큰 자리에서 내가 많이 떨고 버벅거렸음은 틀림이 없었으리라. 그래도 이런 예우는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 발상은 당시 교련 교과가 국책과목으로 최고 대접을 받는 군사독재시절의 문화와 연결된 것이기도 했었지만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내가 마치 큰 인물이나 아니면 높은 지휘관이라도 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그 규모만 생각해 보니 군에서 적어도 연대장 이상 사단장급 예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교사에 대한 정신적인 대우는 있었던 시절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아직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그 당시 고도성장하는 기업들의 임직원에 비해 턱없이 낮은 교사의 보수를 이런 정신적인 예우로 메우려는 정부와 당국의 의중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발령 첫해는 내가 담임교사로서 가정방문하러 마을마다, 골마다 반의 학생들의 집을 방문했는데 한 잔 씩 권하는 술을 반 잔 씩만 받아 마시고도 결국 만취한 건 물론이고, 어떤 집을 막론하고 아이의 담임교사가 방문했다고 학부모들의 예의범절이 깍듯했었다. 머리가 허연 아이의 할아버지가 정중하게 절을 해 오는 바람에 엉겹결에 맞절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당시, 군복무로 잠시 휴직은 하지만 정말 교직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 한 번도 직업으로서 나의 교직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과분하다고 여길 정도였었다.
나는 학교 밑 하숙집에서 가서 미리 사둔 짐을 급히 챙겼다. 마지막으로 교무실의 여러 선배 교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그런데 누가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1,2,3층 교실 창문마다 많은 아이들이 빼곡히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게 아닌가.
“선생님, 훈련 잘 받고 군 생활 잘 하세요!, 선생님 군대 마치고 또 오세요!, 선생님 편지해도 되지요?, 선생님 무척 보고 싶을 거예요......”
하면서 나의 장도를 환송해 주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언덕 위에 위치한 교사 건물의 현관부터 교문 아래 진입로 지나 시외 버스정류소까지 양 옆에 학생들이 도열해서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환송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 길이는 수백 미터나 됨직하였다. 아까 점심시간에 아래 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라고 받아 마신 반주 한 잔 술기운에 마음은 더욱 비감해졌다. 나는 순간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44년도 더 지난 지금이지만 그 순간만은 내 일생의 한 장면이 되어 고비 고비마다 나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곤 했었다.
고향 인근에서 오후에 출발한 입영열차는 거의 10시간을 달려 새벽 2시 지나 훈련소 도착했다. 바로 나의 훈련소 시절은 시작되었다. 학교에다 나의 입대 확인서를 보내야 입대 휴직이 절차대로 처리되기 때문에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나의 군 주소를 알게 되었다. 많은 아이들이 까까머리 훈련병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가장 많이 편지가 올 때는 하루에 열일곱 통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 지독한 더위로 인해 다섯 명이 훈련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나중에 떠돌기도 할 정도로 훈련은 고됐다. 내가 아주 늦게 입대해서 최소 3년이나 어린 동기생들과의 힘든 훈련도, 미칠 듯 한 갈증도, 그 아이들의 이런 격려 편지에 힘입어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직업으로서 교직 선택이 내 생애에서 아주 탁월한 선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셈이다.
고되고 지루한 군 훈련 기간 동안 난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나를 기억해 주고 나를 위해 사연을 보낸 상대에게 내가 먼저 답신을 끊은 적은 없었다.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다. 그게 비록 유치원생이라고 해도 주소만 알면 답은 꼭 해 줬다. 왜냐하면 내가 힘들 때 이를 이겨 내게 하는 것은 주고받는 편지였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서로의 진심이 닿는다.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생긴다. 소통의 힘이 있다. 편지는 받을 때의 그 설렘 못지않게 마음을 다해 쓸 때나 상대에게 부칠 때, 나는 더 힘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취인에게 나의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생을 통해서 이 때 만큼 많은 편지를, 그것도 정성 다한 손 편지를 써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논산 제 2훈련소에서 7~8월 염천(炎天)의 6주간 고된 신병 훈련을 무사히 수료했다. 나는 다시 대전 육군통신학교 10주 코스 후반기 교육에 투입되었다. 교육을 다 마치고 최전방 중동부전선 빡세기로 소문난 교육사단에 배속된 것은, 그해 11월이 지나서였다. 서리가 오고 눈발까지 날리는 강원도 날씨였다. 부대는 김장준비와 월동준비로 분주했다. 그동안에도 많은 아이들과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음은 물론이다.
신참의 전방 겨울 병영생활은 혹독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들의 편지도 확 줄어들었다. 편지를 마지막까지 끊지 않고 보내온 한 아이가 있었다. 바로 ㅎ이다. 학교 문예부에 속해서 책읽기와 글쓰기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당시 ‘샘터’라고 하는 손바닥만 한 종합잡지가 매달 발간되면 그 속에 자기의 편지를 끼워서 보내곤 하였다. 자신의 습작품, 독서법과 추천도서, 진학 진로, 여성답게 사는 길, 바람직한 인성, 아이의 학반 분위기, 학교의 행사와 소식, 교사들의 근황, 문학, 인생, 주변의 일상, 학교 공부 방법, 청소년시절의 이성교제를 포함한 교우관계 등 점차 그 대화의 폭을 넓혀나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폭넓은 인생 상담의 멘토 역할이었다. 사제 간의 신뢰감 또한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새 달이 되면 은근히 샘터 속에 그 아이의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우리는 아이의 바람대로 거의 친구처럼 대화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제대를 하고 그 아이도 졸업을 했다. 나의 입대 이태 째, 아이 고2시절까지는 활발하게 편지를 보내왔었다. 다음해, 아이의 고3 졸업반 시절에는 어쩐 일인지 편지가 영 뜸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로 봐서는 진로 진학문제가 여의치 않음에 따른 큰 고심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는 다양한 주제의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그 아이는 결국 시골의 가정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못했음을 나중에 전해진 편지에서 알았다. 그전에도 진로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겪는 아이의 심경을 위로 격려해주는 이야기도 많이 써서 보내 준 것 같다. 당초 여군 되고자 하는 꿈도 접었다. 군에 있는 나로서는 그 아이에게 진로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음이 몹시 안타까웠다.
지금이라도 당시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은 무엇이었는가를 반추해 보고 싶어졌다. 물론 덧없고 부질없겠지만.
지금 나는 43년 전부터 보내온 아이의 편지를 가지런히 정리해 본다. 편지지는 세월에 삭아서 가는 헤지고 필적마저 희미하다. 너덧 장 되는 장문의 편지마다 중간에 빠진 것도 있다.
그 아이도 어느 하늘 아래서 지금 나처럼 세월의 나이를 먹어가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한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 [나의 ‘인연’ 1, 끝]
2020.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