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별의 시간
청솔고개
봄꽃이 지천을 이루고 있을 때 그 꽃그늘 아래 가면 왠지 숨이 멎는 것 같다. 꽃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언젠가는 이 꽃들이 다 져버리면 이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근원적인 절망감과 불안감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그러한 결별의 절실함은 적잖이 나를 힘들게 한다. 늘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삶은 결별의 시간이 이어짐이다. 예순이 훌쩍 넘도록 살면서 어지간한 결별에는 심상해하고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최근에 두어 번 힘 든 결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하나는 3년 전 8월의 마지막 주.
39년 6개월의 교단을 떠나는 내가 나의 아이들과 나의 생업과 내 전공 교과와 결별의 기간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한테 마지막 수업 시간에 이르러서야 내가 다음 주에 교단을 아주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수업 들어가는 반 순서대로 통보했다. 오롯이 떠나면서 결연한 거리두기라고나 할까!
내 생애의 ‘마지막 수업’, 문학Ⅱ과목 가르치기를 한참이나 하고 난 후, 한 10여분 남겨 놓고 아이들한테 “내가 다음 주부터는 여러분과 같이 수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로 시작되는 결별의 통보를 한다. 내 교사 생애로서는 아이들과의 마지막 인사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며칠 공무 출장으로 수업 몇 시간 비거나 아니면 방학을 앞두고 얼마 동안 못 볼 것 같은 것처럼 애써 담담함을 지키려 한다. 내게 교사로서의 진정한 상상력과 감동을 발견하도록 해준 작품, 가브리엘 루아의 자전적 소설 제목인 “내 생애의 아이들”과 같은 이름으로 아이들을 불러본다. “내 생애의 아이들아!” 하고. 마치 캐나다 알바타 주의 광활한 대지를 품은 아이들한테처럼, 나의 ‘희망 편지’ 마지막 회를 띄어준다. 아이들이 숙연해진다. 짐짓 평온함을 지키려 하는 내 목소리가 떨린다. 표정도 상기된다. 아무리 쿨 한 척, 심상한 척 하지만 잘 안 된다. 두 서너 반까지는 이런 극적인 결별의 방식으로 마무리되는데 내가 떠난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이들은 그들 방식의 결별 의식을 준비한다. ‘그 동안 너희들 때문에 잘 지내다 이제 간다, 함께 한 시간 잊지 않을 게, 잘 있어라······.’로 인사하고 ‘이리 훌쩍 가신다니 매우 섭섭합니다, 정말 뜻밖입니다, 선생님과의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등 단 몇 마디로 함축돼 감정이 절제되고 짙은 여운을 남기게 되는 결별을 꿈꾸었었는데……. 바람처럼 표표히 내 한 손 흔들면 아이들 여러 손 흔듦이 뒤로 남겨지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고 훌훌 떠나는 것이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찰나적, 극적, 시적, 한 순간 깜빡임이나 반짝임 같은 결별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 결별 감성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어느 반에서는 각자가 내게 쓴 쪽지를 읽는데 몇몇은 울먹이기까지도 한다. 나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그 동안 몇 차례 보냈던 나의 ‘희망편지’ 답신 형식으로 꾸며서 띄어 준다. 나의 결별 방식과는 다르지만,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반짝이는 결별 방식을 보여 준다. 그 반향으로 내 가슴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인다. ‘이게 아닌 데, 이게 아닌 데…….’ 하면서도 자꾸 그 자리에 머물고 싶고, 이 순간을 붙들고 싶고, 시간이 여기서 깜빡 멈추어버렸으면 하는 간절함, 절실함이 비어져 나온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지, 우리 아이들과의 마지막 시간이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의 손수건, 초콜릿 봉지 같은 결별의 정표가 나를 울린다. 나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느낀다. 아이들은 마음을 다해서 진정으로 결별을 전하는데 정작 이걸 듣고 있는 나는 그 이름과 얼굴 모습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한테 참 무심했구나. ‘내 생애의 아이들아! 내가 정말 미안하다. 너희들은 이렇게 진정어린 사연을 보내오는데 정작 나는 너희들의 사연과 얼굴 모습이 연결되지 않는다. 답답하고 힘이 든다.’ 하고 고백한다. 내가 너희들을 ‘내 생애’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자격이라도 정말 있는가. 나는 내 감정에도, 내 아이들에게도 진실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후 정말 신기하게도 한 번도 길거리에서 그 아이들을 마주치지 않고 있다. 한 번 손 흔들고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않는 진정한 ‘결별의 약속’을 나도 모르게 지키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그해 11월 중순.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어 응급실, 중환자실을 오가시다가 이제 요양병원에서 코 줄과 오줌 줄에 목숨을 이어 놓은 채 평온하게 계신다. 정신 있으실 때 어머니는 정말 꽃을 좋아하시었다. 집에 계실 때 거실에서 출입문을 열어 놓고 마당에 철따라 피는 꽃 보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다. 어머니가 이제 그 꽃까지 못 알아보신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휠체어로 벚꽃 그늘 아래로 모시고 가니 마치 어린 아이처럼 그리 좋아하셨는데, 이제는 그 화사한 꽃그늘을 폰에 담아서 눈앞 가까이 보여 드리고 좋아하시는 꽃 보시라고 말씀 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몇 천 원짜리 빨간 팬지 화분이라도 사들고 가 놓아 드리면 그리 좋아하시며 종일 그 꽃만 바라보시었는데……. 그 어머니는 이제 꽃은 고사하고 이승인지 저승인지도 모르신다. 아버지는 매일 가셔서 심한 치매로 당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행여 정신 한 자락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봐 그 노구에 40여분 동안이나 팔다리를 주물러드린다. 벌써 몇 달째다. 간병인 등 주변에서는 그러한 아버지 보고 열부(烈夫)나셨다고 한다. 내가 아버지가 힘 드시지 않으시냐고 여쭈면 민망해 하시며 나도 같이 운동 된다고 얼버무리신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인한 지 66년 지난 지금까지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심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보니 결별의 시간은 참 절실하고 아플 것이리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스무 개나 되는 계기판, 주사약 봉지를 달고 온 몸이 부어 있는 위급한 어머니 용태를 걱정하다가 주치의한테 솔직히 어머니의 병세를 알려달라고 하였는데, “길면 2주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나중에 나한테 “내가 니 엄마한테 진 빚이 많은데 아직 다 갚지 못했다. 더도 말고 따스한 봄날, 내년 3,4월까지만 버텨주면 남은 빚 일부라도 갚을 수 있을 텐데…….” 하시고 깊은 한숨 쉬시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언젠가는 결별해야 한다.
이제 내 생애의 그 아이들을 떠나 온 지도 세 해가 다 되어 간다. 그들과의 결별이 비로소 실감이 된다. 바인더 북에 곱게 넣어 놓은 ‘내 생애 아이들’의 간절한 사연 하나하나를 다시 읽어본다. 아이들한테 미안해서 더 이상 읽지 못하겠다. 가슴이 아린다. 오늘따라 불현듯 ‘내 생애의 아이들’이 보고 싶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내 목소리도 들려주고 싶다. 그 때 내가 아직 정년이 1년 더 남았는데 왜 빨리 나왔나 하는 후회감도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그 다음 해 3월 한 달 동안, 거의 스무 곳에 일자리 신청을 해보았지만 서류 전형에서 절반 이상 탈락되고 결과적으로 한 군데도 채용되지 못했었다. 내가 자격이 갖추어져서 필생의 업으로 꼭 해보고 싶었던 전문상담일이나 도서관 사서 일을 통해서 또 다른 ‘내 생애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내 목소리도 들려주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혀있는데. 이제 ‘내 생애의 아이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
또 하나의 다른 결별. 재작년 3월 말에는 그 동안 살았던 우리 집과도 결별의 시간을 가졌다. 31년 동안 살면서 우리 딸 아들을 얻게 해 준 낡은 2층 단독 주택을 두고 아내한테는 평생소원이던 아파트로 옮겼다. 옛집의 목련이 2층 옥상까지 환히 비추더니 이어서 동백이 아롱지고 키 큰 철쭉이 담 너머까지 목을 내밀고 인사한다. 왜 우리를 버리고 가느냐고 읍소하듯이. 대문 옆 모란꽃송이의 짙은 붉음이 올봄 더한 것 같다. 붉은 울음으로 짙은 향훈으로 너도 결별 인사를 하는가. 이제 이사 한 지 두 해가 지났지만 거기서 5년 만에 얻은 우리 딸과 이어서 얻은 우리 아들과 이어진 옛집의 그 인연들과는 쉽게 결별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아직도 망연한 얼굴이다. 옛집에 남겨진 어릴 적 우리 아이들의 낙서, 손 때, 나무 등걸에 난 아이들의 흔적과도 이제 결별이다. 이사할 좁은 아파트에까지 그 인연은 이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그 집도 말끔히 철거되어 교회 주차장으로 쓰인다.
그 새 또 다른 결별. 그 동안 1년 2개월 동안 와병하시던 어머니께서도 지난 해 1월 초 홀연히 가셨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마치 옛말대로 짚불 사그라지듯이 편안히 가셨다. 어머니로 보아서는 내내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허무적멸의 순간이라 편안하셨겠지만 ‘잘 가십시오’ 한 마디 이별의 인사도 귀로 전해 드리지 못한 내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결별의 시간이었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결별의 순간을 만나야 하는가. 결별의 시간은 여전히 내게는 견디기 어렵다. [위의 글은 2017년 봄에 쓴 것임.]
2020.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