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결별의 시간/'내 생애의 아이들' 바람처럼 표표히 내 한 손 흔들면 아이들 여러 손 흔듦이 뒤로 남겨지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고 훌훌 떠나는 것이었는데

청솔고개 2020. 4. 6. 22:42

결별의 시간

                                                                                              청솔고개

 

봄꽃이 지천을 이루고 있을 때 그 꽃그늘 아래 가면 왠지 숨이 멎는 것 같다. 꽃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언젠가는 이 꽃들이 다 져버리면 이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근원적인 절망감과 불안감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그러한 결별의 절실함은 적잖이 나를 힘들게 한다. 늘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삶은 결별의 시간이 이어짐이다. 예순이 훌쩍 넘도록 살면서 어지간한 결별에는 심상해하고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최근에 두어 번 힘 든 결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하나는 3년 전 8월의 마지막 주.

396개월의 교단을 떠나는 내가 나의 아이들과 나의 생업과 내 전공 교과와 결별의 기간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한테 마지막 수업 시간에 이르러서야 내가 다음 주에 교단을 아주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수업 들어가는 반 순서대로 통보했다. 오롯이 떠나면서 결연한 거리두기라고나 할까!

내 생애의 마지막 수업’, 문학과목 가르치기를 한참이나 하고 난 후, 10여분 남겨 놓고 아이들한테 내가 다음 주부터는 여러분과 같이 수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로 시작되는 결별의 통보를 한다. 내 교사 생애로서는 아이들과의 마지막 인사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며칠 공무 출장으로 수업 몇 시간 비거나 아니면 방학을 앞두고 얼마 동안 못 볼 것 같은 것처럼 애써 담담함을 지키려 한다. 내게 교사로서의 진정한 상상력과 감동을 발견하도록 해준 작품, 가브리엘 루아의 자전적 소설 제목인 내 생애의 아이들과 같은 이름으로 아이들을 불러본다. “내 생애의 아이들아!” 하고. 마치 캐나다 알바타 주의 광활한 대지를 품은 아이들한테처럼, 나의 희망 편지마지막 회를 띄어준다. 아이들이 숙연해진다. 짐짓 평온함을 지키려 하는 내 목소리가 떨린다. 표정도 상기된다. 아무리 쿨 한 척, 심상한 척 하지만 잘 안 된다. 두 서너 반까지는 이런 극적인 결별의 방식으로 마무리되는데 내가 떠난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이들은 그들 방식의 결별 의식을 준비한다. ‘그 동안 너희들 때문에 잘 지내다 이제 간다, 함께 한 시간 잊지 않을 게, 잘 있어라······.’로 인사하고 이리 훌쩍 가신다니 매우 섭섭합니다, 정말 뜻밖입니다, 선생님과의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등 단 몇 마디로 함축돼 감정이 절제되고 짙은 여운을 남기게 되는 결별을 꿈꾸었었는데……. 바람처럼 표표히 내 한 손 흔들면 아이들 여러 손 흔듦이 뒤로 남겨지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고 훌훌 떠나는 것이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찰나적, 극적, 시적, 한 순간 깜빡임이나 반짝임 같은 결별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 결별 감성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어느 반에서는 각자가 내게 쓴 쪽지를 읽는데 몇몇은 울먹이기까지도 한다. 나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그 동안 몇 차례 보냈던 나의 희망편지답신 형식으로 꾸며서 띄어 준다. 나의 결별 방식과는 다르지만,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반짝이는 결별 방식을 보여 준다. 그 반향으로 내 가슴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인다. ‘이게 아닌 데, 이게 아닌 데…….’ 하면서도 자꾸 그 자리에 머물고 싶고, 이 순간을 붙들고 싶고, 시간이 여기서 깜빡 멈추어버렸으면 하는 간절함, 절실함이 비어져 나온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지, 우리 아이들과의 마지막 시간이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의 손수건, 초콜릿 봉지 같은 결별의 정표가 나를 울린다. 나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느낀다. 아이들은 마음을 다해서 진정으로 결별을 전하는데 정작 이걸 듣고 있는 나는 그 이름과 얼굴 모습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한테 참 무심했구나. ‘내 생애의 아이들아! 내가 정말 미안하다. 너희들은 이렇게 진정어린 사연을 보내오는데 정작 나는 너희들의 사연과 얼굴 모습이 연결되지 않는다. 답답하고 힘이 든다.’ 하고 고백한다. 내가 너희들을 내 생애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자격이라도 정말 있는가. 나는 내 감정에도, 내 아이들에게도 진실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후 정말 신기하게도 한 번도 길거리에서 그 아이들을 마주치지 않고 있다. 한 번 손 흔들고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않는 진정한 결별의 약속을 나도 모르게 지키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그해 11월 중순.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어 응급실, 중환자실을 오가시다가 이제 요양병원에서 코 줄과 오줌 줄에 목숨을 이어 놓은 채 평온하게 계신다. 정신 있으실 때 어머니는 정말 꽃을 좋아하시었다. 집에 계실 때 거실에서 출입문을 열어 놓고 마당에 철따라 피는 꽃 보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다. 어머니가 이제 그 꽃까지 못 알아보신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휠체어로 벚꽃 그늘 아래로 모시고 가니 마치 어린 아이처럼 그리 좋아하셨는데, 이제는 그 화사한 꽃그늘을 폰에 담아서 눈앞 가까이 보여 드리고 좋아하시는 꽃 보시라고 말씀 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몇 천 원짜리 빨간 팬지 화분이라도 사들고 가 놓아 드리면 그리 좋아하시며 종일 그 꽃만 바라보시었는데……. 그 어머니는 이제 꽃은 고사하고 이승인지 저승인지도 모르신다. 아버지는 매일 가셔서 심한 치매로 당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행여 정신 한 자락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봐 그 노구에 40여분 동안이나 팔다리를 주물러드린다. 벌써 몇 달째다. 간병인 등 주변에서는 그러한 아버지 보고 열부(烈夫)나셨다고 한다. 내가 아버지가 힘 드시지 않으시냐고 여쭈면 민망해 하시며 나도 같이 운동 된다고 얼버무리신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인한 지 66년 지난 지금까지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심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보니 결별의 시간은 참 절실하고 아플 것이리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스무 개나 되는 계기판, 주사약 봉지를 달고 온 몸이 부어 있는 위급한 어머니 용태를 걱정하다가 주치의한테 솔직히 어머니의 병세를 알려달라고 하였는데, “길면 2주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나중에 나한테 내가 니 엄마한테 진 빚이 많은데 아직 다 갚지 못했다. 더도 말고 따스한 봄날, 내년 3,4월까지만 버텨주면 남은 빚 일부라도 갚을 수 있을 텐데…….” 하시고 깊은 한숨 쉬시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언젠가는 결별해야 한다.

이제 내 생애의 그 아이들을 떠나 온 지도 세 해가 다 되어 간다. 그들과의 결별이 비로소 실감이 된다. 바인더 북에 곱게 넣어 놓은 내 생애 아이들의 간절한 사연 하나하나를 다시 읽어본다. 아이들한테 미안해서 더 이상 읽지 못하겠다. 가슴이 아린다. 오늘따라 불현듯 내 생애의 아이들이 보고 싶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내 목소리도 들려주고 싶다. 그 때 내가 아직 정년이 1년 더 남았는데 왜 빨리 나왔나 하는 후회감도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그 다음 해 3월 한 달 동안, 거의 스무 곳에 일자리 신청을 해보았지만 서류 전형에서 절반 이상 탈락되고 결과적으로 한 군데도 채용되지 못했었다. 내가 자격이 갖추어져서 필생의 업으로 꼭 해보고 싶었던 전문상담일이나 도서관 사서 일을 통해서 또 다른 내 생애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내 목소리도 들려주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혀있는데. 이제 내 생애의 아이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

또 하나의 다른 결별. 재작년 3월 말에는 그 동안 살았던 우리 집과도 결별의 시간을 가졌다. 31년 동안 살면서 우리 딸 아들을 얻게 해 준 낡은 2층 단독 주택을 두고 아내한테는 평생소원이던 아파트로 옮겼다. 옛집의 목련이 2층 옥상까지 환히 비추더니 이어서 동백이 아롱지고 키 큰 철쭉이 담 너머까지 목을 내밀고 인사한다. 왜 우리를 버리고 가느냐고 읍소하듯이. 대문 옆 모란꽃송이의 짙은 붉음이 올봄 더한 것 같다. 붉은 울음으로 짙은 향훈으로 너도 결별 인사를 하는가. 이제 이사 한 지 두 해가 지났지만 거기서 5년 만에 얻은 우리 딸과 이어서 얻은 우리 아들과 이어진 옛집의 그 인연들과는 쉽게 결별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아직도 망연한 얼굴이다. 옛집에 남겨진 어릴 적 우리 아이들의 낙서, 손 때, 나무 등걸에 난 아이들의 흔적과도 이제 결별이다. 이사할 좁은 아파트에까지 그 인연은 이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그 집도 말끔히 철거되어 교회 주차장으로 쓰인다.

그 새 또 다른 결별. 그 동안 12개월 동안 와병하시던 어머니께서도 지난 해 1월 초 홀연히 가셨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마치 옛말대로 짚불 사그라지듯이 편안히 가셨다. 어머니로 보아서는 내내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허무적멸의 순간이라 편안하셨겠지만 잘 가십시오한 마디 이별의 인사도 귀로 전해 드리지 못한 내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결별의 시간이었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결별의 순간을 만나야 하는가. 결별의 시간은 여전히 내게는 견디기 어렵다.      [위의  글은 2017년 봄에 쓴 것임.]

                                                                                                 2020.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