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生涯)의 아이들

끝까지 네 편이 되어 줄게 (1/2)/상복을 입은 아직 앳된 새댁이 내게 목례를 해서 나도 답례를 했다

청솔고개 2020. 5. 14. 06:25

끝까지 네 편이 되어 줄게 (1/2)

                                                                     청솔고개

 *다음은 5월만 되면 생각나는, 끝까지 네 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 가슴 아파했던 지난날 나의 교단 이야기이다.

  4년 전 어느 가을날인가 내 30대 후반 시절 한 제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k아시지요? 걔가 그만 오늘 새벽에 고인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창 시절 마지막 담임이셨던 선생님께는 연락을 드려야할 것 같아서요? 아이가 늘 선생님은 자기 학창 시절 마지막 담임이셨다면서 이야기 자주 했었어요.”

그때가 그들 고2 시절이었고 난 그 아이의 담임이었다.

‘k녀석!’, 내 교직 생애에 한 아픔이었던 아이. 문득 30년도 더 된 그날이 생각난다. 월요일 운동장 전체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내 반과 옆 반 아이 너덧이 교실에 남아서 집단 패싸움을 벌였다. 몇몇은 피투성이가 된 채 순찰 중이던 학생주임교사에게 적발된 것이다. 결국 그 중 셋은 권고 전학 처분이 내려졌다. 내 반에 있었던 k는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생활하기 때문에 전학할 엄두도 못 내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k를 그렇게 만든 데는 담임교사로서의 나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아이한테 좀 더 세심한 보살핌과 진심어린 대화가 부족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7년 전. 그 아이들이 동기회를 열면서 담임이었던 나를 불러주었다. 그런데 구석에 반주기를 다루는 한 젊은이가 유난히 익숙해져 보여서 보았더니 바로 k녀석 아닌가.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야야! k아닌가. 반갑다.” 하면서 손을 잡았다. 옆에서 이 친구 연주 실력 참 좋습니다.”하고 거든다. 친구들이 동기회 행사에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k를 불렀던 것이다. 나는 또 그때 생각이 나서 그냥, “k, 너만 보면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래 잘 지내고 있지?” 나는 또 학교를 그만두게 한 그 때 생각이 떠올라 나직이 말하니 선생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늘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안부도 늘 듣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 말해주니 내가 더 고맙다.” 하면서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의 장례식장에 문상 가면서 나는 이렇게 떠올려 보았다.

제자의 영전에 분향하고 재배를 하였다. 옆에는 상복을 입은 아직 앳된 새댁이 내게 목례를 해서 나도 답례를 했다. 그 아이의 부인이라고 옆에서 말해 주었다. k가 혼인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이가 이제 돌 지났다고 했다. 내 가슴이 너무 아리었다.

이 일로 나는 마음이 여리고 아파 그 시절의 질풍과 노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 즉 청소년 상담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따스한 말 한마디라도 더 전해주는 일이 내 제2모작의 소명이라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청소년 상담 공부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했었다. 상담연수에 꾸준히 참석했고, 활성화된 온라인 상담 연수를 많이 거치고 10여 년 전에는 자비로 전문상담교사 1급 자격을 취득했었다.

드디어 퇴직. 나는 자원 봉사 활동을 포함한 여러 청소년, 학생 상담일에 2년 동안 응시했으나 반은 서류에, 반은 면접까지 가서 탈락되었다. 그래도 계속 시도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드디어 지역의 교육지원청에서 학업중단위기 학생을 새롭게 출발하도록 돕는 뉴스타트 프로그램 상담원 활동을 위촉받았다.

(‘끝까지 네 편이 되어 줄게전편, . 20175월에 쓴 글2020.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