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기억 1, 육신의 고통에 비례해서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청솔고개
아름다웠던 여행에 대한 추억만큼 값진 것이 또 있을까?
한 여름의 오전 숲 속은 너무 서늘하다. 그 서늘함은 나를 가끔 아득한 여정으로 이끌어 들인다. 나는 흘러간 아름다운 날들을 회상해 본다. 나의 인생 여정(旅程) 같은 것 말이다. 여행은 그 과정이 하나하나 우리 삶의 여정과 같아서 큰 매력이 있나보다. 그래서 나는 여행에 그토록 미치는 것 같다. 가기 전에 미치고, 가면서 미치고 갔다 온 뒤, 아아! 세월이 지나면 더욱 미치는가 보다.
그 흘러간 날들의 아름다움은, 빛나는 청춘시절, 힘겨웠던 중년시절, 이제는 초로(初老)의 나날들까지 모두 길 위에 존재한다. 나는 길 위에 있다. 인생이란 길 위에 존재한다. 그래서 직립보행(直立步行)하거나 주행(走行)한다.
우리 내외는 별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은 꼭 이 숲을 찾는다. 때로는 서늘하고 깊은 숲의 기운을 맛보기 위해서, 때로는 산책과 달리기를 위해서, 때로는 우리만의 전용 야외카페(자판기)의 커피 향을 음미하기 위해서이다.
비 오는 날은 그런 날대로 깊은 숲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후드득하는 소리가 좋고, 저 서남 녘으로 어리는 아득한 운무(雲霧) 기운(氣運)이 좋다. 바람 부는 날에는 나무들이 바람을 대체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 여린 가지부터 굵은 가지까지가 바람을 맞이하는 방식을 엿보는 것도 좋다. 그 나뭇가지들의 유연(柔軟)함, 그 흔들림, 그 춤추는 듯 한 온몸으로서의 바람맞이 모습이 좋다. 나도 저렇게 세월과 인생의 바람을 맞이해야 할 터인데……. 잘 안 된다. 흉내라도 내어야 할 터인데…….
우리는 여기서 차 한 잔을 하면서 지난날의 여행을 꿈꾸고 현재 여정에 취해 있고 앞으로 갈 길에 대해서 들뜬 마음으로 설계하고 있다.
달리는 것이 이렇게 상쾌하고 멋질 줄이야? 이렇게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아질 수가 있단 말인가? 달리면서 혹은 뛰면서 나는 나의 지난 여정을 떠올린다. 그것은 너무나 값진 추억이다.
숲 속으로 혹은 강변 둑길로 바람처럼 달리면서 나는 많은 것을 떠올린다. 나는 바람이 된다. 바람이 달려 나갈 때가 바로 이런 기분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바람에 미치는 걸까?
나는 성장 교양소설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드무비처럼 달리면서 혹은 걸으면서 겪는 많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성장기록이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 운트 골드문트’에는 황금의 입술로 불리는 골드문트가 평생을 방황과 방랑으로 생의 한 가운데를 보내는 장면이 실감나게 전개된다. 푸른 초원으로, 전쟁판으로, 유곽(遊廓)으로……. 그러면서 겪는 많은 이야기들은 내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찍부터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었다. 그는 정말 절묘하게 삶이란 절대적인 여행 코스를 방랑이라는 멋진 패키지 상품으로 여행 시장에 내놓은 여행 전문가라고나 할까? 나도 그에게 홀려서 20대 후반 청년시절에 “걸어서 간다”[徒步旅行]를 흉내 내어 보았다. 걸어서 끝없이 걸어서 행운유수(行雲流水)를 닮아 보기로 했던가.
1979년도 여름. 군에서 갓 제대한 뒤라서 그런지 겁나는 게 없었던 것 같다. 군대 생활의 끈기와 담력이면 다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7월 장마가 다 끝나고 8월 초가 되자 혼자 중앙선 열차에 올랐다. 풍기역에 내렸다. 정오 한여름 길을 두어 시간 걸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험한 길을 혼자 걸어갔다. 두 시간마다 있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이참에 헤세의 도보여행을 느껴보기로 했다. 영주 소수서원, 무량수전을 걸어서 둘러보고 소수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교 숙직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텐트를 풀었다. 숙직교사는 신경이 쓰이는지 교실에서 자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준비한 장비도 사용해 볼 겸 운동장에 서 첫날 저녁 야영을 했다.
다음날 준비한 버너로 아침을 끓여먹고 역시 혼자서 소백산을 올랐다. 동쪽 사면이라 솟아오르는 아침 해의 이글거리는 기운이 온몸을 삶는 것 같다. 오르다가 웃통을 벗고 몇 번이나 석간수에 머리를 축였다. 혼자 가는 길은 힘들고 외롭지만 또한 무한한 자유로움도 있다. 가다가 힘들면 쉬었다 가고, 더 힘들면 한 숨 자다 가도 뭐라고 할 사람 없다.
드디어 이름만 듣던 비로봉으로 올라 점심 먹고 저 멀리 비운의 나라 걱정이 서려 있는 국망봉까지 일망무제 호쾌한 능선을 걸었다. 그야말로 천상의 초원이었다. 여기서 나는 비로소 워즈워드의 ‘초원의 환한 빛과 들꽃의 빛나는 영광’을 보았다. 도중에 젊은 산꾼 하나가 작은 호미하나를 들고 어슬렁어슬렁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지 관심을 보이자 그때까지 말로만 듣던 에델바이스를 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꽃을 우리말로는 ‘솜다리’라고 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이 천상의 화원은 갖가지 야생화의 천국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에는 구름 몇 점이 걸려 있었고 바람도 서늘했다. 산위에서 텐트를 치고 둘째 날을 묵었다. 나와 같이 야영하는 텐트가 서넛 됐다. 이 산꼭대기에서 혼자가 아니라서 그래도 다행이었다. 식수는 야영지에서 10여 미터 아래 샘터가 있다고 옆에서 알려주었다. 나도 비닐로 된 접이식 물통에 물을 담아왔다.
이렇게 저녁을 지어 먹고 얇은 홑이불 하나를 덮어쓰고 덜덜 떨면서 잠을 청하는데 옆의 텐트에서 나를 부른다. 가보니 벌써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당시 시판되던 사구려 보드카류의 독주를 준비해왔다면서 나 보고 한 잔 같이 하자고 한다. 몇 잔 거푸 얻어 마시고 얘기 좀 나누다가 텐트에 오니 몸이 훈훈해 지는 게 한기가 훨씬 가신다.
산바람이 세서 그런지 구름도 야영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산위 기온을 예측 못한 게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정상 능선에서 텐트를 치니 밤의 산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나는 배낭의 짐을 줄인답시고 덮을 거로 삼베 홑이불을 담아 왔던 것이다.
한밤이다. 다시 혼자다. 텐트에 누워서 열린 틈 사이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구름 속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반달을 만난다. 순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왈칵 몰려왔다. 그 외로움은 나 혼자라는 자유로움이 주는 외로움 그대로다.
아침에 일어나니 거의 몸이 다 얼어 있었다. 밤새 덜덜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연화봉 코스로 해서 하산한다. 오전 내내 세차가 휘몰아치는 안개 비바람으로 시야가 트였다 막혔다 한다. 희방사와 희방 폭포 코스로 내려왔다. 아래는 달궈진 흙의 열기로 얼굴에 화끈거렸다. 또다시 헤세 류의 구름과 들꽃의 감성을 느끼려해 본다. 명상의 경지를 통한 무아의 희열 같은 것이 조금은 체득할 수 있었다. 그 여행길은 그야말로 求道의 길이라고나 할까?
달궈진 몸을 식히려고 희방계곡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을 담그려는 순간 그만 쫄딱 미끄러지고 말았다. 오른쪽 둘째 발톱이 바위에 걸려서 반쯤 빠져 덜렁거린다. 끔찍했다. 그때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독립지사들이 검거되어 일제에 고문당할 때, 손톱, 발톱 밑에 대침이나 대추나무 가시로 찔러서 자백을 강요하거나 불지 않으면 심지어 펜치로 손톱, 발톱을 뽑는 악행까지 저질렀다고 들었다. 그 때 끔직한 통증이 다시도 떠올리기도 싫은 바로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 덜렁거리는 발톱이 주는 통증이란 상상 이외였다. 계곡 물에서 제대로 몸도 식히지 못하고 다시 길 떠났다. 나는 자유를 찾아 마음먹고 떠난 이 여행길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도중에 약방에서 소독약, 머큐롬으로 간단히 처매놓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 수가 있을까 걱정됐지만 그래도 걸었다. 소백산 뒤편 충북에 위치해 있는 단양 고수동굴 앞까지 걸어갔다. 여기서 셋째 날 밤을 보내려고 했다. 혼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하는데 발가락의 통증이 더 심해진다.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해지는 것 같다. 육신의 고통에 비례해서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어렴풋한 신념이 그 때 비로소 생기게 되었는가?
[이 글은 2002. 10.에 쓴 것을 다시 정리한 것임, 다음편은 '그 여름의 기억 2'로 이어짐]
2020.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