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노르웨이 가는 길 (3/3)/그래서 여행은 독주(毒酒)에 중독되는 현상이다

청솔고개 2020. 5. 27. 08:10

노르웨이 가는 길 (3/3)

 

                                                         청솔고개

 

   드디어 여행 중 월요일 아침을 두 번째 맞는다. 여행 열흘째, 당장 귀향한대도 크게 바쁠 게 없는 게 은퇴자의 처지 아닌가. 이건 하나의 기쁨이기도, 여유이기도 한 것.

   아침에 다행히 날이 좀 갠다. 호수의 물안개를 배경으로 일행들의 모습을 기록해 둔다.

 

   플롬 산악열차 탑승 코스 가는 길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24.5km 라르달 터널을 지난다. 터널이라야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암반을 그냥 뚫어서 굴을 만들어 놓은 정도다.  이게 무척 인상적이다.

 

   오전 8시 좀 지나서 뮈르달 역에 도착. 여기는 자연이 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 웅장함, 위대함의 총화다. 바위, 폭포, 계곡, 구름, 그리고 인간들의 탄성이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룬다. 플롬 노선을 따라 야생 그대로인 노르웨이 산악을 달리는 것이다.

   1940년에 개통한 이 산악철도는 피오르 관광의 하이라이트다. 해발 2m에서 해발 866m의 뮈르달까지 약 20km 구간을 50분 동안 달린다. 모두 11개 역과 20개의 터널(총 길이 6km)이 있으며, 길이 20km의 선로는 선로 좌우에 펼쳐진 풍광이 압권이다.

 

   운행 구간 중에, 230m 높이의 4단 계단으로 이루어진 뮈르달스 폭포가 있는데 직하 형 부분에서 제일 높은 곳은 100m이다. 기운차게 뻗어 내리는 효스 폭포(Kjos Fossen)를 보기 위해서 해발 670m에 위치한 전망대 5분간 정차한다. 우리 일행들은 내리다 말고  어릴 적에나마 보았을 것 같은, 구식 열차 승강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산위를 쳐다보니 폭포의 포효가 천지에 진동하고 물보라가 안개처럼 포말을 이룬다. 멀리 산 중턱에는 노르웨이 전통의상을 입은 한 무희가 피오르의 요정으로 현현한다. 그녀의 춤과 노래가 폭포수에 파묻힌다.

 

   나는 이 기이하고도 신나는 자연에 도취되어 전망 좋은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더 많은 풍광을 내 눈에 넣고 내 가슴에 갈무리하려고 애쓴다. 셀 수 없이 많은 폭포줄기, 계곡, 눈을 이고 있는 바위산, 그 아래 반짝이는 계곡의 맑은 물과 청청한 녹음을 눈과 가슴으로 빨아들이고 호흡한다.  이렇게 자연 자체에 심하게 몰입되는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여기서 2시간은 경이, 그 자체다.

[여행 10일 째, 2016. 5. 23.(월) 07:00~13:00, 노르웨이 라르달(LAERDAL) ~ 플롬 노선 ~ 뮈르달 역 ~ 베르겐으로 출발]

 

   다음은 노르웨이의 제2 수도 베르겐 가는 길.  날이 좀 맑아진다. 그 햇살에 북국 봄꽃의 생명력이 터져오르는 듯하다. 길가는 노란 민들레 꽃밭으로 이어져 있다. 양떼가 군데군데 보인다. 어린 새끼양이 어미젖을 빨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본다. 어린양이 어미 옆에 폭 엎드려 누워서 눈감고 잠든 모습은 잊을 수 없다. 지상의 평화경 그대로다. 햇살이 호면을 비춘다. 어제 운무 자욱했던 피오르 호수와는 또 다른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아, 베르겐(Bergen)!

   내 20대 청춘시절, 뮤지컬 영화 ‘송 오브 노르웨이(song of Norway)’의 주인공 모델인, 그리그(EDVARD GRIEG)가 마흔 살 지나 만년을 살았던, 그의 제2 고향이다.

   이 영화는 1970년도에 개봉된 뮤지컬 시네마다. 그리그의 청춘시절의 사랑과 우정, 음악적 노력과 꿈, 좌절과 성공을 그린 이 영화의 장면이 4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 영화 초입, 타이틀백으로 나오는 노르웨이의 자연 풍광이 나를 압도하였었다. 특히 피오르 초원 위에서 바이올린의 연주에 맞춰 노르웨이 전통복장을 한 어린 아이들부터 젊은이들이 차례로 출연해서 함께 추는 춤은 지금 보아도 압권이었다. 영화 '에델바이스'의 명 장면에 견줄만 하다.

 

   살아오면서 언젠가는 한 번 꼭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제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제 내가 그 영화에 나오는 감동적인 음악이 깔리는 꿈속 같은 아름다운 풍광의 노르웨이를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이제 그의 고향까지 와 버렸다. 젊은 날에 나는, 그의 음악을 계기로 해서 클래식 음악의 세계를 조금은 알 수 있었고, 클래식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다.

 

   1843년 베르겐에서 태어난 그리그는 1885년부터 1907년 영면할 때까지 유럽 연주여행을 할 때 외에는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작곡활동을 했었다. 그의 생가가 베르겐 교외 가까운 곳에 있다 해서  찾아보고 싶었지만, 동행에 매인 몸이라 자유롭지 못하다. 진정한 자유는 내게 아직 한참 멀었나 보다.

 

   그의 <페르 귄트>모음곡 중 제 4곡 ‘솔베이지의 노래’의 선율은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자주 감상했었다. 지금도 들을 때마다 조금은 쓸쓸함, 늦가을 바람 같은 우수가 서린다.

   그 배경 스토리.

    ‘게으름뱅이, 허풍쟁이 페르귄트는 혼약한 여인 솔베이지를 내버려 두고 헛된 환상을 쫓아 방랑의 여행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부자가 된 늙은 페르귄트는 고향이 그리워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거대한 풍랑을 만난다. 결국 그는 거지꼴이 되어 목숨만 붙어 있는 채, 집으로 돌아오는데 백발이 성성한 솔베이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만신창이 페르귄트는 솔베이지의 품에 안겨 안식을 찾고 그녀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어요.' 하면서.

 

   ‘자연 속에 구원이 있다’고 한 그리그의 영감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 ‘피아노협주곡’은 북구 대자연의 서사다. 이 곡으로서 그가 노르웨이 국민주의 작곡가로서 추구하던 국민음악의 틀을 완성한 것이다. 당시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조국 노르웨이에 바치는 '노르웨이 자연의 찬가'라 할 수 있다. 코펜하겐에서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LISZT)도 이 불후의 명곡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혼이다.”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번 여행길에서 직접 내 눈으로 본 노르웨의 위대한 자연을 통해 그 음악의 깊이를 더욱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 찾은 베르겐은 12~13세기 노르웨이의 수도였었고, 하르당엘피오르와 송네피오르 등 많은 피오르로 둘러싸여 있어 피오르의 수도라고 불린다. 북위 60° 22′의 고위도에 위치하나,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철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이며, 지형적인 영향으로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 이상으로 유럽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의 전성기, 대항해시대, 1,360년 맺은 한자동맹 사무소가 여기에 설립되면서부터 북해 지역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베르겐 도심에서 이 한자동맹 건물 자취가 남은 아담하고 유서 깊은 어항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로 점심 요기를 했다. 25만 인구의 이 도시 규모는 여기서 제법 큰 셈이다.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라고 하는 베르겐 어시장을 둘러보았다. 생선 수프, 훈제 및 절인 연어, 고래 고기, 청어, 사슴고기, 어묵, 조리한 새우도 유명하지만 아주 큰 랍스타, 킹클랩이 별미라고 안내돼 있다. 

   시내 전경을 보기 위해서 플뢰엔 산을 케이블카로 올랐다. 그 동안 계속 흐리고 비 오다가 여기서는 좀 맑아졌다. 이 도시는 일 년에 270일이나 비가 온다고 하는데 오늘 맑은 날 맞이한 게 운이 좋은 편이다. 피오르 관광과 북극권 크루즈 여행을 떠날 유람선과 요트가 떠 있는 베르겐 항구 전경이 보인다. 산, 피오르, 바다, 도시의 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바닷가 유서 깊은 항구이라서 우리나라 목포나 통영, 여수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주황색 기와가 나지막이 덮인 도시의 색깔은 분명 북유럽이었다. 기와조각으로 모자이크해 놓은 듯 한 고색찬연하고 도시다.

   넋을 잃고 이국적인 풍광에 도취한다. 부두마다 빼곡히 들어서 정박하고 있는 요트 떼들이 인상적이다. 이 나라의 풍요와 여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여행길 중이지만 지금 바로 저 배 중 하나를 집어타고 북극해 탐사라도 떠나고 싶은 심경이다. 

 

 

   야일로(Geilo)로 가는 길. 이제 5월 하순에 한참 눈길을 달릴 것이다. 중간에 터널의 화재사고 수습 때문에 잠시 내려서 기다렸다. 터널 입구에서 잠시 서 있으면서 주변 산세와 풍광, 민들레 꽃밭에 현혹이 되어 본다. 터널 안이 마치 금광의 갱도 같다. 여기도 자연 훼손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시설과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래서 다소 투박하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점차 고원 분지 같은 평평한 고지대를 숨 가쁘게 달려 오른다. 그런데 오를수록 옆의 계곡 물살은 더 급해진다. 주변은 대 설원이다. 이 높은 고원지대에 마치 막 폭우가 내린 것처럼 맑은 물이 기세 좋게 쏟아진다. 그 옆으로는 아직 늦겨울이다. 새 움도 트지 못한 떨기나무숲들이 한창 물을 머금고 봄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도 지붕으로 잔디를 인 오두막집 같은 여름 별장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지나오면서 많이 보아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지붕에 얹은 흙에 풀이 자란다면 그 단열효과는 단연 으뜸일 것이다. 친환경적인 주택형태라 생각된다. 가도 가도 하얀 눈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이어진다. 아름답고 황홀하다. 한 곳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내려서 모두 강아지처럼 좋아하고 당나귀처럼 껑충껑충 뛴다. 일망무제 눈밭, 도대체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겠다. “세상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외계를 탐험하는 개척자가 된다. 멀리 눈이 쌓여 높은 언덕을 이룬 곳은 짙은 블루, 에메랄드다. 길을 돌아 내려오면 크고 작은 호수의 옅고 짙은 블루. 이런 길이 4시간 동안 이어진다.

   저녁 8시, 낮아진 데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산장 마을 야일로(Geilo)의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맞은편 야산의 스키장 슬로프에 눈이 허옇게 남아 있다. 지금 가면 탈 수 있으려나. 이 마을은 오지라서 스키시즌에나 북적이는 곳이다. 지금은 무척 한산하다.

   저녁 8시 15분에 바로 식사. 일행은 이제 피곤에 절은 듯 객실에 들어가면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는다.

밤 10시가 지나도록 혼자서 호텔 주변 마을을 서성거려 본다.

   동행은 처음엔 객실 발코니에서 내가 서성이는 모습을 보면서 손도 흔들어 주더니 이젠 피곤에 전듯, 객실에서 꼼짝하지도 않는다.

   북유럽에서의 마지막 보내는 밤이니 만큼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호텔 앞으로 펼쳐진 너른 초원에 조성된 작은 마을, 마을에 꾸며진 주택과 리조트형 숙박시설, 그 사이로 아직 움이 채 트지도 않아서 웅크리고 있는 듯 한 나무들, 잘 보전되어 있는 크고 작은 목조 건물들을 둘러본다. 호텔 뒤 굴다리 통로 위를 지나는 철로를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았는데, 그 동안 기차 지나가는 건 못 보았다. 철로 옆 초원에는 이제 막 파릇파릇한 어린 풀들이 돋아나고 있다. 앙증맞은 노란 작은 꽃이 이 밤에도 나를 보고 웃는 것 같다. 목조로 지어서 오래되어 윤이라도 날 듯 한 이 호텔 건물을 찬찬히 살펴본다. 호텔 벽과 벽에 붙어있는 전시함에는 이 나라 조상인 바이킹 족이 사용했다는 창, 칼 같은 무기와 낡고 바랜 기록 사진, 그 시대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하고 제법 많은 수의 소품들이 편안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런 마지막 풍광은 사진으로 잘 기록해 두었다.

   밤11시인데도 주변이 훤하다. 오롯이 나 혼자 주변을 서성이면서 여행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여기의 위도도 백야(白夜)현상의 위치이지만, 나로서도 오늘 마지막밤은 잠 안 자고 하얗게 새는 백야(白夜)를 맞이해야 할 것만 같다.

[여행 10일 째, 2016. 5. 23.(월) 13:00~23:00, 노르웨이 베르겐 도착 ~ 브뤼겐거리 식당~베르겐 전망대~산장 마을 야일로(Geilo)가는 길~야일로의 숙소]

 

   오늘은 이 여행 동안 현지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 7시에 호텔에서 출발했다. 이제 이틀에 걸쳐, 오슬로 공항에서 출발, 모스크바 가서 비행기 다시 갈아타고,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날씨는 약간 서늘하고 역시 짙게 흐려 있다. 어젯밤에 내가 정말 보았던 건가 싶게 우리 호텔이 그림 같은 목조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출발이다. 목조 건물들이 잔디와 초지 위에 서 있다가 나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이별이다. 떠나간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지나치는 곳마다 자작나무의 ‘그 스스로 고귀한 자태’를 여기서는 맘껏 볼 수 있다. 공항 가는 쪽으로 내려올수록, 움조차 제대로 트지 않았던 고원 산장마을 일대와는 달리 숲이 더욱 짙어진다. 계곡마다 눈 녹은 물이 콸콸 쏟아진다. 아직 양, 염소, 소, 말 같은 가축은 안 보인다. 지나치는 크뢰단빙하호수 물길에는 흐린 하늘색이 그대로 투영된다. 오슬로 공항 가면서 수없이 이 호수를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고 또다시 만난다. 거울 같은 빙하 호숫가에도 노르웨이 숲은 이어져 있다.

   자작나무숲의 나라, 노르웨이를 떠나면서 또다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떠오른다.

 

   이곳을 앞으로 언제 다시 한 번 더 올 수 있겠는가.

   여행 중, 여행 마치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에 늘 빠져있다.

   여행길이란 늘 이러한 아쉬움이다.

   일회성일 수밖에 없기에 더 절실하다.

   여행길은 우리 인생의 길을 꼭 빼닮았다.

   인생길의 축소판이다.

   또한 모든 생명체는 이렇게 떠다니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귀소(歸巢) 본능이 있다.

   이제 나도 다시 나의 거소로 귀환한다.

   여행은 떠다님과 돌아옴의 반복이다.

 

   그래서 여행은

   독주(毒酒)에 중독되는 현상이다.

[여행 11일~12일 째, 2016. 5. 24.(화) 07:00~17:00, 베르겐 ~ 오슬로 ~ 모스크바,

2016. 5. 24.(화) 21:00 ~ 2016. 5. 25.(수) 11:00, 모스크바에서 인천으로 출발. 인천 도착.

 

                                                              2020.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