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기
청솔고개
내가 현직에서 나오면서, 그 순간은 나의 ‘자유인, 자연인’을 마구 구가할 것 같았는데, 세상일이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당시 어머니는 8개월 째 치매와 노병으로 요양병원에 계시었고, 아버지는 그 어머니를 거의 매일 면회를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자전거 타고 병원에 가서 30분이나 넘게 팔다리를 주물러드리신다, 치매로 소통도 안 되는 데도 어머니와 말을 나눈다, 하시는 걸 일과로 삼으셨다. 병원의 간호사나 간병사들이 지나치다고 눈치를 주어도 아버지는 막무가내이셨다. 아버지가 어머니한테는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책하듯 몇 차례나 그 상황을 나한테 호소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내가 퇴직한 지 두 달 지난 그 당시, 아내와 같이 짧은 일본 내 자유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 여행은 오래 전부터 나의 퇴직 기념으로 기획된 것이고, 당시 어머니도 그렇게 심각한 병증은 아니셔서 양친께 다녀온다고 말씀드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었다. 여행 마지막 날 귀국해서 인천공항에서 짐을 찾고 내려가는 공항버스 차표를 끊는 등 급히 서둘렀다. 그때 오늘 아침 일본에서부터 아버지의 두 번이나 통화기록이 다시 생각나서 바로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심하게 편찮으시다고 하셨다. 며칠째 식사도 안 하시고 해서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휠체어에 태우려했었는데 어머니가 완강히 거부하셔서, 아버지는 무리하게 태우려 했고,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는 그냥 휠체어 뒷부분에 빠져버려서 쉽게 나오지도 못하시니, 이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극도로 화가 난 아버지가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다가 고함도 치면서 살짝 밀치기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국 몸에 상처가 생기고 기력도 급격히 쇠진해 지셨는데, 뒤늦게 어머니한테 함부로 대한 당신의 심한 행동 때문에 그런 결과를 초래한 데 대한 자책감이 크셨다. 아버지는 전화로 이런 전말을 거의 울먹거리듯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도착하는 대로 내일 아침 바로 들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전화를 끊었었다. 아버지가 무척 힘들어하시면서 이런 죄책감을 갖게 된 것이, 마치 나의 부재 중 때문인 듯 내 마음도 또 무거워졌다.
어쨌든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행동이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 극성으로 보였던 것이다. 다른 환자 관리하는 데도 지장이 있고 여러 모로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때 그 자책감에서 벗어나시려는 듯, 어머니 보고, “제발 이 겨울에는 가지 말고 꽃 피고 새 우는 내년 봄에라도 가면 내가 당신한테 심하게 한 것, 잘못 한 걸 보상할 시간이라도 벌 테니까, 그 때까지는 기다려 주세요.” 하고 혼잣말처럼, 부탁하는 말처럼 되뇌곤 하셨다. 그런데 정말 그 해 겨울은 지나고 봄, 여름, 가을도 지나 다음해 겨울인 1월 초에 가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는 거의 매일 그렇게 어머니 요양병원을 다녀가셨던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떠나보내시면서 장례식장에 큰소리로 울부짖듯이 하신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이(李)**씨, 당신과 만난 후 66년 세월을 함께 잘 보냈소. 당신 먼저 가 있으면 내가 곧 뒤따라가리다.”
이런 상황이니 퇴직 후 나의 인생 과제를 수행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퇴직 즈음해서 송별 식사 자리에서 후배들이 내게 “이제 나가시면 무엇부터 먼저 하실 거예요?”하고 물었다. 내가 응답한 말인즉슨, 첫째 멀지 않은 야산에 울타리를 치고 염소 방목 농장을 시작해 보겠다는 것, 둘째는 남미 자유여행인데 최단 6개월, 최장 2년 정도 계획으로 시작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후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와 멋지십니다.”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한 지 6년이 다 돼 간다. 나는 서너 차례 아주 구체적인 남미 자유여행 최소한 100일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 나는 그 때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담으면서, 남미 여행 관련 방송 영상은 티브이에서, 관련 여행 가이드북, 실제 자유여행객의 생생한 체험 등은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 또 읽었다. 달력에다가 몇 차례 출발과 도착 일시를 정정하기도 해 보았다. 심지어 영어가 잘 안 통한다는 안데스 오지나 남단 파타고니아 지대의 여행을 위해서 틈틈이 스페인어 말공부도 독학으로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집안 사정을 비롯한 주변의 결정적인 사건이 나의 여행 출발의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이제는 다 해결된다 하더라도 COVID19라는 전 지구적인 난관으로 당장 시행은 더욱 어렵게 된 셈이다.
하도 답답해서 내가 그 전에 개설해 놓은 다른 사이트 하나에도 다음과 같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나의 필생의 업, 파타고니아 방랑기
시립 도서관에서 브루스 채트윈(BLUCE CHATWIN)의 역작 '파타고니아(In Patagonia, 김훈 옮김)'를 몇 차례 빌려 놓고서도 아직도 독파를 못했다. 그래서 내가 그곳에 가고 싶은 열망이 아직 덜 무르익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거기로 떠날 용기가 부족한 건 아닌지? 아버지의 간병 같은 집안 사정 운운하는 건 공연한 핑계는 아닌지? 별 생각이 다 든다.
39년 6개월 현직에서 일하다가 물러나는 송별연 자리에서 후배들이 내게 묻기를 "선배님, 나가시면 뭣부터 먼저 하실 거예요?" 나는 "우선 1~2년은 푹 쉬었다가 자그마한 야산 골짜기에 들어가서 울타리를 좀 둘러치고 염소 몇 마리 방목하면서 거기에 다가 욕심 더 내면 연못도 좀 파서 미꾸라지나 붕어를 키우는 것이고, 그 후 심신을 좀 가다듬어서 남미 자유 여행을 시간 구애받지 않고 맘껏 하는 거……." 했더니, 후배들이 퇴임 선물로 남미 여행서 4권, 일반 여행서 1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반드시 여행 다 하고 난 다음 귀국보고회 하셔야 한다고 웃으면서 다짐을 받는다. 나는 남미 자유여행의 꿈에 부풀어 바로 그날부터 한 달 내에 그 책을 다 읽어버렸다. 그런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도서관에 가서 남미 여행서는 거의 매 차례 빌려서 제목이라도 맛보고 남미 로망의 욕구를 대신 채우는 것이었다. 아니면 TV여행 채널에서 안데스 산맥 트레킹을 함께 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해 왔다.
그 동안, 1년여 요양병원에서 투병하시던, 향년 86세, 어머니의 별세, 5년 간, 아버지의 병원 입퇴원 총 7회, 그것도 올해 들어와서는 벌써 4회로 증가 추세, 이것저것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고 변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에는 내가 어떤 식으로라도 도움을 베풀어야 할 상황이 된다. 그것이 계속된다.
그래서 난, 벌써 기나긴 혹독한 그 파타고니아 황야를 방랑하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 대한민국 내 조국, 내 인생의 파타고니아 황야에서 말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내 인생의 파타고니아 여정에는 때로는 갈증과 통증으로 고통당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길 가다가 길 나그네 만나 내가 가진 수통에 물 한 모금 나눠 마시면서 동행하던 주변인들도 있다. 그래서 내 여행은 그리 지루하지 않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늘도 난 내 인생의 파타고니아 황원을 걷는다. 2019. 9. 9. ******
이렇게 했다고 해서 내 스스로한테 진 빚과 귀국보고회를 열겠다고 한 후배들에게 진 책 빚과 희망 빚을 탕감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계셨던 그 곳에서 6년 전 어머니에 대해 진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고 계실까?
202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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