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길 따라’ 제2일 (프랑크플루트 숙소, 아우토반, 하이델베르크, 괴테의 집)

청솔고개 2020. 12. 6. 22:47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길 따라’ 제2일 (프랑크플루트 숙소, 아우토반, 하이델베르크, 괴테의 집)

                                                                                      청솔고개

 

   09:20에 노보텔 숙소에서 출발하여 하이델베르크로 향발하였다. 차 안에서 가이드는 독일인에 대한 기본 사항을 알려준다. 다음은 가이드가 독일 전반에 관한 것을 안내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무척 친절한 국민성을 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본을 거쳐 독일의 교육관이 일찍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법철학은 아직도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그래서 길에서 차량이 고장 나면 의무적으로 도와주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독일에서는 자기 집 앞에 눈이 내려 쌓인 것을 치우지 않고 있다가 행인이 넘어져서 다치면 치료비를 보상하도록 규정해 놓았다는 것이 과장은 아닌 듯싶었다. 세세한 부분까지도 법으로 정해놓은 합리적인 사회가 바로 독일이다. 물론 정과 의리 같은 것으로 결속된 우리들의 정서와는 다른 점이 많겠지만. 도심이나 골목 군데군데 잘 그려진 벽화 같은 낙서가 무척 특이했다. 여기는 그래서 낙서할 수 있는 면허도 있다나. 잔디밭 깎는 것도 모두 정원사 면허증을 소지하여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소나무랑 수양버들은 이미 늦가을 단풍에 곱게 물들었다. 말로만 듣던 아우토반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계속되는 가이드의 안내 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세계에서 가장 긴 14,000㎞고속도로망으로 히틀러시대에 이미 건설되었다고 한다. 차 구경을 하다가 우리 차 현대 엘란트라가 보여서 무척 반가웠다. 독일에는 고속버스가 없다. 휴게소도 없다. 도시와 도시는 기차로 이동하고 관광화물차는 제한 속도가 100㎞이나 승용차는 무제한 속도다. 그러나 대략 1차선을 달리면서 시속 180~200㎞ 정도이며, 통행료는 번호판이 촬영되어서 후불해도 된다고 했다. 일정배기량 이상은 오토바이도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있으며 도로 설계는 무척 합리적이어서 급경사지역은 벨로드롬처럼 최상의 안전도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런 지역은 반드시 본인이 알아서 시속 100㎞는 지킨다고 한다. 8,000만 명이 4,000만대의 자동차를 운행하고 있어도 체증이 없는데 그 이유는 가게나 회사는 09:00까지 출근하고 관공서는 09:00~12:00까지만 근무하며 오후시간은 자기 개인 업무 보는 시간이란다.

   병원 같은데도 점심시간이 보통 2~3시간 정도 소요되고 그것도 월, 수, 금 3일만 근무하면 된다고 했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의사 역시 고소득 인기 직종이다.

   공장 근무는 대체로 2,3교대제가 시행되며 중소기업도 07:00~15:00 동안 근무한다. 여유와 풍요의 땅인 듯했다. 개인은 연간 3~4회 정도 해외여행을 즐기며 휴가기간 최소 30일은 법적으로 철저히 보장된다.

여름휴가 2~3주, 크리스마스, 신정 1~2주 등을 포함해서 토, 일요일제외하고 모두 6주가량의 휴가가 보장된다고 했다. 그래도 수출 세계 2위, 1인당 국민소득 세계 1위(미국2,400만원, 독일5,000만원)를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장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로봇처럼 부림을 당한다고 한다. 대체로 모두들 3시에 철저히 퇴근 시간을 지킨다고 한다.

   단독주택에 더 많이 살고 있는 시민들은 일요일 등 휴일에는 철저하게 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고 나서 주로 화단을 돌보거나 집을 수리한다고 했다. 거리의 상점들은 오후 8시면 모두 문을 닫기 때문에 오후 8:30이면 인적이 드물 정도라 했다. 토요일도 오후 4:30이면 거리에는 사람 보기 힘들며 중고생이 거리에서 흡연하고 남녀교사들도 스스럼없이 맞담배질을 한다나. 교육에서는 체벌이 철저히 금지되고 있으며 자식이 부모에게 매사에 이유를 잘 따지는데 이때도 윽박지르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주거나 혹은 설득하는 것이 자녀 교육의 기본 방침이란다. 독일에서도 자식 키우기는 역시 힘들다고 한다.

   독일인의 생활습성을 살펴보면 이외로 화장지로 마구 코 푸는 방식이 보편화되어 있으며 식사 때에는 식탁 위에 반드시 손 얹어야 한다. 맥주를 즐겨 마시는데 알코올 도수는 8~9도 정도이며 특히 뮌헨의 맥주 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가게는 밤새 불을 켜놓는데 보안과 홍보 목적이다. 금요일 12:00에서 월요일 09:00까지 2박 3일 주말 휴가는 철저히 지킨다.

멀리 뒤로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바라다 보이는 하이데베르크대학 거리와 건물

   드디어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보았던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였다. 하이델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뮌헨, 프랑크푸르트 등과 함께 독일 여행의 대표적인 목적지라 한다. 먼저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찾았다. 대학이라 해서 우리처럼 구내가 울타리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그냥 한 동네가 대학 건물이 모여 있는 대학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대학건물이 자유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위도가 높아서 그런지 거리의 풍경은 한겨울이다. 나무에는 잎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아 벌거벗고 있다. 이 대학에서는 철학, 교육학, 수학, 과학 등에 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14만 이 도시의 인구에 이 대학이나 고성(古城)을 보러오는 관광객이 한 해 350 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 부가 가치를 짐작할 만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특히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으로 보아서도 그 전통과 수준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1907년 하이델베르크인 유골의 발견도 주목할 만하다. 이 지역은 인쇄 기술 공업이 주로 발달해 있다. 대학 옆의 하이델베르크 성은 1,400년대에 1,600년대에 지어졌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내려다보는 주황색, 황갈색 지붕을 한 시가의 모습은 단아하고 고풍스러워 가장 독일적인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라인 강의 지류인 성 내부에는 넓은 잔디밭에서 있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문(Elizabethemtor)은 프리드리히 5세가 제임스 1세의 딸이자 아내인 엘리자베스 슈트아르의 생일 선물로 하룻밤 만에 아내 몰래 세워 기쁘게 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의 오른쪽 부분은 2차 대전 당시 파괴되었으며 그 왼편의 아름다운 정원은 이곳의 명소이다. 넥카 강 옆의 ‘철학자의 길’에는 흐르는 강물 따라 지금도 독일 정신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려오면서 하이델베르크 성안에는 약사 박물관을 보았다. 술 주조하는 공장 같은 이곳은 세계 최대의 술통이 안치되어 있는데 술통 겉에 한국어 낙서가 정말 눈에 거슬린다.

넥카 강쪽에서 바라다 본 늦가을비에 젖어든 하이델베르크 고성

  하이델베르크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범상치 않다. 그렇지만 하이델베르크를 아름답게 하는 요소는 다른 면에 있다. 도시 전체에 깃들인 진한 암갈색 사랑의 빛깔이 바로 그것일 터이다. 이 사랑의 빛깔이 이처럼 강력하지 않았다면, 황태자가 평범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틱한 내용의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Student Prince)'이 어찌 감히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개인마다의 평가기준은 분명 다르겠지만 이는 그다지 경솔한 단정은 아닐 듯싶다.

   귀로에 괴테의 집을 찾았다. 이곳은 중부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의 집과는 별도의 것이다. 여긴 프랑크푸르트 하르쉬그라벤 거리 구시가의 중심지 근처의 작은 거리에 위치해 있는 괴테의 생가. 문호 괴테가 1749년 8월 28일 이 집에서 태어나 청년기인 26세까지를 살았다. 그가 여기서 24세까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의 초고를 썼다.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일부 소실된 것을 그 후 18세기 양식으로 완벽히 복원시킨 괴테의 집 곳곳은 유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치는 동안 문호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넓고 밝고 즐거운 집' 이라고 괴테 자신이 말한 대로 제법 큰 저택이었으며, 18세기 프랑크푸르트의 상류계급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괴테를 두고 "한명의 작가라기보다 하나의 문화"라는 니체의 평가처럼 괴테는 독일정신과 문화의식의 중심이다. 방마다 청년시절 괴테의 체취가 아직도 풍기는 듯이 잘 보존된 기념관이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한 게르만민족의 기록벽과 유물의 보존 습성이 부럽기만 했다. 민족의 역사로 견주어 보아도 우리가 결코 꿀릴 것이 없는데, 그것의 보존과 기록 측면에서는 우리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이 글 모두에서도 인용하고 언급했듯이, 나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여정을 따라 함께 떠나 볼 것이다. 그래서 다시 1786년 9월 3일로 되돌아가서 서늘한 새벽에 괴테가 이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마차를 타고 떠난 그 순간을 마음속으로 상상해보고 기억으로 재현해 볼 것이다.

   대문호 괴테의 관심은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학문의 전 분야였다. 박물학이라고 했던가. 동식물, 지층, 암석, 기상, 조각, 회화, 건축물 등 어디 한 분야라고 비껴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그를 두고 천재라고 했던가?

   이어서 시내 주요 부분, 뢰머 광장, 담 광장, 성 바롤메 대성당을 둘러보고 면세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이 주요 여행대상지인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는 광장과 성당이 주를 이루지만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하여 대단한 감흥은 없었다.

   저녁에 모두들 독일 정통 생맥주집 분위기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뜻이 맞는 몇몇이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택시는 여기가 독일이 아니라고 할까봐 전부 벤츠 사륜구동 차다. 운전수에게 한국 차범근 선수를 아느냐고 서투른 영어로 한마디씩 물었는데, 대단히 반갑고 즐거운 어투와 표정으로 대답하는데 정말 ‘차붐’이 이곳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유명하긴 한가 보다. 맥주홀에 들어섰다. 길쭉하게 안쪽으로까지 뻗은 맥주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유쾌한 표정으로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대화를 즐기는 독일인들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하고 즐거워 보였다. [1997. 11.23(일, 제2일/12일)]

                                                                                      2020.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