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다. 햇살 때문에 가린 커튼 사이로 쪽새미, 박물관, 남산이 휘익 휘익 스쳐간다. 마치 내 70평생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남녘으로 떠나는데 햇살은 그대로 역광으로 내리꽂힌다. 모두들 햇살을 피하려고 커튼을 꽁꽁 여미어 대니 밖을 내다볼 틈새 하나 없다. 그래도 차가 덜컹대면서 커튼 사이로 언뜻언뜻 산록과 들녘의 풍광이 스치어간다. 나는 폰을 바짝 그 틈에 대고 바깥 풍정을 담아본다. 자꾸 뒤로만 남겨 두고 멀어져가는 겨울 들녘이 마치 내 한생 같이 겨울 역광에 서릿발 돼 바스라진다. 겨울 풍경이 물결처럼 흘러간다. 사람 발자취 하나 안 보이는 어떤 간이역을 지나고 있다. 철길 양 옆에 조성해 놓은 대나무, 소나무들이 휙휙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있다. 보이는 모든 게 잿빛이다. 짙은 갈색의 대지와 산야다. 짙은 연두색 겨울 댓잎은 오늘도 어떤 영감을 전해주는 것 같다. 생명력과 상상력을 준다. 추억과 그리움의 풍광이 겨울바람에 휙휙 날아간다.
호계역에 가까워 오면서 나는 불현 듯 55년 전 기억에 소환된다.
내 소년 시절 막바지, 나의 질풍노도의 시대에 나는 어떤 미지의 힘에 끌린다. 그래서 나는 당시 고향 마을의 부농의 장손답지 않게 주말이나 휴일 혹은 일찍 학교 마치는 날에는 고학생 행세를 했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의지다. 나의 선택이다.
고 1,2년 때, 그 고학생의 하루는 이러했다.
먼저 중앙선 종착역에서 무임승차한다. 울산역 다 가까이 가면 홈에 도착하기 전에 차에서 탈출한다. 이 액션은 일제강점기나 7,80년대 민주화 투쟁 시절의 지사나, 열사라도 된 듯 나름대로의 비장미로 덧칠한다. 다소 무모하고 나름 놀랄만한 용기였다. 내가 내리고자 하는 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차는 속도는 점차 느려진다. 나는 이때마다 그 속도의 임계점을 잡아서 보란 듯이 뛰어내리곤 했었다. 기차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서 내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지거나 나뒹굴어 질 때도 있었다. 위험천만한 위법행위였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 구간의 차비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게 그 신묘한 기운의 이끌림에 충실히 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에 사로잡힌 신념 같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없이 부대껴야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원숙한 도의 경지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설산이나 광야에서의 수행, 혹은 연단의 다른 이름이었다. 왜곡된 신념에 극한적으로 충실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솟아나는 백성의 지위나 자격을 앞당길 수 있는 방편이라고 스스로 강박하였던 것이다. 그 시절 이러한, 바보 같거나 아니면 앵벌이 코스프레로 지탄 받을 일을 감행한 것은 당시로서의 나의 신념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늘 스스로 변호한다. 그 통과의례의 마지막 관문은 발가벗고 거리에 뛰쳐나가 자신의 신념을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한 겨울에 도랑물이나 강물로 목욕재계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어야한다. 나는 극한의 가혹한 조건을 내 걸었지만 어찌어찌하여 통과해서 그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핍박이고 고행이었다.
지금의 나의 몸과 마음의 끈기도 그 당시의 이런 연단(煉鍛, 혹은 鍛鍊)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래도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기록과 소회는 이 블로그 ’2020.7.14.에 올린 2020.7.12.자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무임승차로 울산 시내에 도착한 나는 울산 시내 골목마다의 다방이나 방어진, 장생포 일대 변두리의 선술집을 전전한다. 60년대 중후반 국가 공업단지 조성으로 개발독재를 구가하던 울산에는 유흥업소도 비례해서 생겨났었다. 나는 다방레지나 술집 아가씨에게 환심을 사려는 손님의 심리를 영악하게 훔친다. 낱개 껌과 볼펜 한 자루씩을 내밀면서 제발 팔아달라고 깍듯이 인사하고 간청해 본다. 나는 짐짓 지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애원하는데 능숙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구걸 같은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숫기라고는 하나 없던 내게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겨났던 것인지 지금 내가 생각해도 참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간혹 동정심 넘치거나 마음 약한 중고교 동문이라도 만나면 내가 입은 교복과 교모, 명찰 양식, 새겨진 이름을 보면서 자신의 중고시절을 회상이라도 하듯 선뜻 열 개 들이 껌 한통을 다 사 주기도 했다. 그날은 횡재를 한 셈이다. 이른바 운수 좋은 날, 재수 좋은 날이다.
내게 남은 그 때의 가장 강렬한 인상은 허벅지나 가슴팍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차려 입은 다방아가씨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입성 밖으로 삐져나오는 육감과 에로틱한 기분에 스스로 얼굴이 화끈해졌던 적도 더러 있었다. 처음엔 외면하였다. 나중에는 은근히 그런 장면과 분위기를 즐기기나 하려는 듯한 나를 확인하게 된다. 선술집이나 안방술집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 접대부가 풍기는 강한 분 내음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그건 완전 딴 세상의 분위기였다. 당시 일자리가 태부족한 도시빈민들의 생활고에 지친 아녀자들은 이런 유흥업소직으로 내몰리기 일쑤였다. 그들의 예정된 코스였다. 남자의 막다른 골목은 막장의 광부나 뱃사람 되는 것, 여자의 막다른 길은 접대부나 거리의 여자에로의 떨어짐이었다. 20대에 들어서 당시 대 히트했던 “겨울여자” 주인공 경아는 이때 내가 체험한 감성을 잘 터치한 듯, 평생을 두고 뇌리의 영상에 자주 오버랩 된다.
기차가 울산 석유화학 단지 옆을 지나칠 때 나는 이런 복잡한 회상에 잠기었다.
열일곱, 열여덟 살 소년이 감당하기는 벅찬 고비였었다. 어쨌든 그런 고비에 고비를 넘고 넘어서 나의 지금이 형성된 것은 팩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철길을 평생 고마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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