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아아! 동해남부선 4, 이 철길의 덜컹거림도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지난 세월 이 철길에 이어진 끝없는 회상에 빠져든다

청솔고개 2022. 1. 7. 00:56

      아아! 동해남부선 4, 이 철길의 덜컹거림도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지난 세월 이 철길에 이어진 끝없는 회상에 빠져든다                                                 

                                                     청솔고개

  오늘은 또 우리가 41년 전에 처음 상면한 날이다. 그래서 내가 동해남부선 마지막 타보기 같은, 이런 이벤트를 제안했던 것이다.

  초면이다. 맞선 자리에 나온 한 아가씨가 나보고 교회 성가대 활동 때문에 성탄전야 밤샘 교회 행사로 잠 한숨 못자고 나왔다고 했다. 그녀는 어쩐지 좀 붓고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날의 만남은 양가를 아는 중매쟁이들이 만든 맞선 자리였다. 아무리 둔한 나였지만 그 뚱해 보이고 호의적인 표정이라고는 잘 찾아볼 수 없어 보이는 초면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식의 반전을 가져올 매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둘 다 통과의례였다. 혼기 다된 노총각, 노처녀에 대한 양가 부모의 걱정이라도 덜어드리고자 하는 일회용 면피성 만남 같았다. 실제로 그 때 나의 일기의 기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양, 너무나 평범한 인상~, ~배석한 양가 사람들의 찌든 모습~” 운운한 것은 그 당시 나의 심경을 충분히 솔직히 표출했다고 본다. 신혼 초 아내가 우연히 나의 이 기록을 보고는 “당신한테는 내가 이런 첫 인상이었군요?”하면서 나한테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던 게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 후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만 되면 그런 우리의 첫 만남을 얘기하고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아주 로맨틱하거나 극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마치 몇 백 년 전 조선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고전적인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딱 두 번인가 만나고는 내가 먼저 청혼했었다. 그렇게 해서 전격적으로 혼인으로까지 골인한 건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두 사람의 운명이 두어 번의 만남으로 결정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참 극적, 운명적, 매우 예외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하는가 보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맞선 본 남녀의 두 번 째 만남은 망각되고 있었다. 한 겨울 어느 날, 시내 대릉원 담 모퉁이를 지나는 한 순간 맞선 본, 은행 근무 그 처녀가 내 뇌리에 퍼뜩 떠올랐다. 그 떠올림이 기적을 불러일으켰는가. 내가 무슨 생각에 홀려서 그 때 그녀에게 전화를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서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제안하고 대뜸 한번 보자고 했다.

  그 당시 나의 겨울 방학은 다 끝나 가는데 부모님들은 몇 차례나 “전에 본 그 아가씨와는 어떻게 돼 가나? 방학 끝나서 집 떠나기 전에 뭔가 여물과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자꾸 재촉하곤 하셨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부모님들께 내가 혼사에 이런 정도는 신경 쓰고 있다는 시그널을 주기 위한 단순한 액션이기도 했다.

  약속 시간, 장소에 맞춰서 나갔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약속한 다방에서 한 시간 동안 기다렸는데도 상대방은 안 나타났다. 화가 치민 나는 혼자 씩씩 거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막 나가버리려고 하는 순간, 그녀 역시 벌게진 얼굴로 들이닥쳤다. 그때 내가 대뜸 내지른 말, “***씨 당신이 얼마나 도도한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지금까지 남아있었어요.”하고 불쑥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 짓지 않고 그냥 배시시 웃는 것 같았다. 엷고 묘한 웃음기를 흘리고 있었다. ‘어어, 이것 봐라! 그야말로 도도하기 짝이 없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뭔가 아주 자신만만함을 내재한 듯, 차분히 나를 기다리고 지켜보겠다는 듯 한 사인을 내게 주고 있었다. ‘어, 이게 뭐람, 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과 황당한 시투에이션은…….’ 그래서 나도 짐짓 더 크게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남자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 표출이었다. 그녀가 나를 황당하게 했다는 사실, 그녀의 차분한 미소 뒤에 감춰진 자신감과 진지함 등의 알 수 없는 매력이 내 마음의 밑동을 조용히 흔들었음을 혼인 한참 후에 나는 알았다. 그때 이미 나는 이 여인과 평생의 운명을 같이하여야 함을 예감했었다. 해가 바뀐 1월 중 한 번 더 그녀를 만났다. 같이 극장에서 영화보고 난 다음 나오면서 계단에서 내가 먼저 청혼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건 나중에 이야기한 아내의 말이다. “당신과 두 번째 만남에서 서로 한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화가 나서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도도한 여자인지 확인하러 나왔소!" 운운하면서 퍼부을 때였습니다.” 그 때 내 코에서 콧물이 조르르 흘러내리던 걸 보고 너무나 우스웠다면서 나의 그런 모습에서 오히려 순수한 면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순박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하고 나를 더 좋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한평생 운명 지워짐은 이리도 묘하고 기구하다. 내 코에서 흘러내리던 콧물에서 순수함을 발견하다니! 요즘은 10년을 연애하고도 혼인해서는 3년도 못 살고 갈라서기도 한다는데 나는 세 번 만나고 혼인해서 살고 있다. 41년을 살고 있다.

  종착역까지 나는 철길 위에 있다. 이제는 이 철길의 덜컹거림도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지난 세월 이 철길에 이어진 끝없는 회상에 빠져든다. 2022.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