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이런 회상에 빠져 있을 때 열차는 벌써 멀리 고리발전소를 배경으로 임랑역을 지나고 있다. 이 해송림이 울창한 간이역은 해안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해변으로 바짝 붙어서 지나가는 이 철길이 지난 여름과는 달리 지금은 상실의 감성에 젖어있다.
50년도 더 전이었다. 내 20대 초반, 대학 시절에 부산 동래구에 살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집을 방학만 되면 내 집 드나들 듯하던 때가 생각난다. 새벽 첫차로 상행하면서 이 임랑역 부근을 지날 때마다 차창 너머로 아침해가 천상의 광휘로 뻗어 나왔었다. 그 해돋이의 강렬함에 빠져들던 순간이 평생토록 생애영화의 한장면처럼 떠오르곤 하였었다. 특히 겨울이면 얼어붙은 듯한 바다를 녹이는 불타오르는 일출은 열정과 신비 그 차체였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 불타는 겨울 새벽바다의 강렬한 정경을 떠올려본다. 달이 부서지는 겨울 밤바다도 좋지만 해송림 사이, 갯바위 너머 퍼져나가는 불바다 같은 새벽바다의 인상은 내 평생 바다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호계역에 정차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내일 모레면 여기도 폐역이 돼 승객들의 추억의 장으로 남을 것이다. 여기부터 이북으로 난 철길은 폐쇄되니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호계역'이란 역사의 이름이 나오도록 폰에 담으려고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맞은편 철길에 수하물 기차가 역 간판을 가리고 있어서 결국 못 담았다.
이후로는 다 없어지는 노선이다. 기차가 동해남부선 상행선 종점에 다다를수록 나의 이 상실의 아쉬움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이미 어두워진 밖을 응시하기도 하고 언뜻언뜻 불빛에 비치는 바깥 풍광을 폰에 담기도 하고 이 철길에 이어진 그간의 회상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사람의 삶은 흐르는 강물처럼 일회성이다. 실개천에서 대하로 흘러내려 바다로 가면 다시 근원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행길도 인생과 같다. 이 순간, 이 자리는 두 번 다시 없다. 혹 나중에 다시 그 자리에 간다해도 그건 다시 돌아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의 내 기분, 감성, 감동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긴다. 여행길에서 내가 미치듯이 거기에 집착하는 이유다.
아내는 나의 이런 행태를 잘 받아준다. 드디어 상행선 종점 역에 도착했다. 심히 춥다. 마지막이 될 지 몰라 플랫폼벤치에 앉아 보았다. 이런 나의 모습을 폰에 담아 달라고 아내한테 부탁했다. 광장으로 나왔다. 종착역사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의 휘황한 불빛이 무심하게 찬바람에 떨고 있었다.
내 생애에서 묻히고, 끊어지고, 걷힌 많은 인연들이 생각난다. 내 고향마을의 고향집, 내 아이들을 키운 집을 비롯해서 얼마더 많이 이러한 인연의 상실과 단절을 겪어야 하는가 싶다.
우리도 올겨울 처음닥친 맹추위에 벌벌 떨면서 곧장 집으로 향했다.
2021.12.25.토. 오늘은 이러한 5편의 긴 기록을 남기고 내 한 생애를 깁는 기억으로 남는다. 실로 내 삶에서 한 획을 긋는 날이었다. 2022.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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