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치렁치렁 삼단 같은 머리채에 검고 깊은 눈매의 그 처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처녀는 옅은 미소를 띠면서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 떨리는 마음에 얼굴마저 화..

청솔고개 2022. 2. 20. 23:42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 꿈에서 그 소녀 같은 모습이 몇 번 나타난 것 같았다. 55년 전 일이다."                                                 

                                                       청솔고개

   세상 모든 남성들에게는 일찍 속으로 품었던 구원의 여인상이라는 게 있다. 나는 어떤 구원의 여인상을 꿈꿔왔던가. 내게 어린 시절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작용한 것은 몇몇 소설 장면이나 영화 화면에서 나오는 여성들의 이미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춘원의 '유정'에 나오는 남화노선의 딸 '남정임' 같은 비운의 여성, 영화 '라이안의 딸'에서 자유로운 사랑을 위해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었던 여주인공 '사라 마일즈'는 나의 첫사랑이라 결코 잊지 못한다. 괴테 '파우스트'의 '그레트 헨', 단테 '신곡'의 '베아트리체'에서 발현되는 신성과 절대성은 천상의 사랑이라 범접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더욱 경도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몽상가 '나'에 의해 구현된 사랑의 본질을 드러낸 '나스첸카'는 사랑의 영원성을 구현한 여성이다. 내가 평생토록 마음에 품었다. 지금도 사랑하고 싶다. 박범신 작가의 '풀잎처럼 눕다'에서는 폭력을 순수함으로 승화시킨 '은지'는 청순과 운명 그 자체이다. 지금도 그 아가씨를 떠올리면 눈물이 흐른다.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있다. 조해일 작가의 소설이며 같은 이름 영화 '겨울여자'에서 '이화', 최인호 작가의 소설이며 같은 이름 영화 '별들의 고향'의 '경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두 여성의 신념은 당대의 인습인 성적 편견을 깨트렸다. 성 불평등에 대한 해방과 자유, 여성권의 선언을 읽을 수 있다. 헌신과 용기라는 매력이 넘치는 여주인공이다. 한번 포옹해주고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여주고 싶다. 모두 10대에서 20대에 걸쳐 내게 각인된 여성상의 모델이다.

   나는 당시 내 청춘의 불안과 고뇌를 언젠가는 이런 구원의 여성이 관음불처럼 내 앞에 현현해서 나를 구원해 줄 것 같은 환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구천의 선녀나, 불계의 관음보살, 천상의 가브리엘 천사 같은 여성상을 꿈꾸었다. 지고지순한 여성상이다. 그래서 나는 현실의 여성에 구체적으로 다가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것은 여성성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20대 중반이 됐다. 대학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유, 순수의 내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허망감에 몸부림쳤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나의 시대가 떠나가기 전에 어떤 사랑이라도 실현시키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나의 '베아트리체', 나의 '은지', 나의 '경아'는 어디에 있는가. 찾아 헤맸다. 나는 대학 졸업을 즈음해서 6개월 정도 거의 몽상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심히 방황하였고 미친 듯이 사랑의 본질과 깊이를 탐닉하고자 했다. 당시 나는 페테르부르크의 다리 위에서 '나스첸카'를 기다리는 '나'가 되어도 좋았다. 때로는 광기에 사로잡혀 보고 싶었고 때로는 끝 간 데 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고도 싶었다. 대상에게 허망한 언약을 남발해 보기도 했다. 강가 구름다리 위나 빌딩 스카이라운지에 올라서면 동행에게 함께 뛰어내리자는 망상을 제언해보기도 했다. 끝내 나는 허망하게 하나의 사랑도, 인연도 잡지 못했다. 나는 깨달았다. 평생 내가 찾아 헤매던 구원의 여인상은 현실의 공간에 있지 않고 결국 내 마음에 있음을.

   졸업을 하고 현직에 1년 여 있다가 군에 갔다. 3년 지나 전역을 했다. 내 청춘은 살 같이 흘러갔다. 나는 대세를 따라 혼인을 하게 됐다. 그 무렵 나는 나의 뇌리에 아직도 각인돼 있었던 앞의 여성상들을 떠올려 보았다.  삼단 같은 머리채의 그 소녀도 더불어. 나는 그 때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신부될 사람에게 내 맘속으로 ⁰“……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하고 편지를 썼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의 청춘 시절 나를 격동케 하고 잠 못 들게 했던 구원의 여인상이 바로 나의 약혼녀이었고 곧 나의 품에 안길 나의 신부될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¹"~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2022. 2. 20.

   문득 내 열여섯 살 때 일이 생각난다. 고향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능골 밭에 감 따러 간 길이었다. 마을 골목을 지나는데 한 소녀가 활대를 잡고 홍시를 털고 있었다. 치렁치렁 삼단 같은 머리채에 검고 깊은 눈매의 그 처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처녀는 옅은 미소를 띠면서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 떨리는 마음에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가슴이 콩닥거려 나는 더 이상 그 소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황급히 가던 길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떴다. 그 후 내가 마을 친구에게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그 집 사정에 대해서 물었더니 몇 달 전 아랫마을에서 이사왔다고 했다. 나는 그 소녀가 그래서 낯설었던 걸 알 수 있었다. 그 후 고향 마을 그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행여 그 소녀가 있는지 기웃거려 보았지만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 후 꿈에서 그 소녀 같은 모습이 몇 번 나타난 것 같았다. 55년 전 일이다.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레트 헨도 베아트리체도 그렇게 가슴에 남아 나의 평생의 여인상으로 성장했을 터이다.

[주(注)]

⁰“……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 김춘수님의 시 '꽃을 위한 서시' 에서

¹"~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님의 시 '꽃'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