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나는 다시 걸을 수 있을까 2

청솔고개 2022. 1. 3. 00:58

                                                                                                 청솔고개

  최근에 나의 척추관협작증 증세가 점차 심해진다. 하루에 걸쳐서도 그 증세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가 널뛰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백 여 미터를 걸어가도 약간 뒤뚱거리는 느낌만 들뿐 거뜬히 답파하는데 또 어떤 때는 십 여 미터를 걷지도 못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이삼백 미터는 족히 되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았을 때는 자전거로 이동한다. 희한하게도 자전거 안장에 다리만 걸쳐서 첫 페달 밟을 힘만 있으면 나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하초에 힘이 원초적으로 부족하니 살짝 오르막이거나 갑자가 뭔가 나타나면 급히 제어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어떤 때는 30분 이상 페달을 밟고 진행하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자전거를 세워야 하는데 중심을 잡을 기운마저 빠져버려서 덩덩거리다가 겨우 담벼락 같은 데 살짝 붙여서 조심조심 다리를 내린 적도 있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고는 온 가족이 모두 걱정을 하는 것도 은근히 참 부담스럽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에게 닥친 이 병증을 어떻게 수용하고 처치할 것인가에 고심하게 되었다. 어찌된 셈인지 나도 모르게 나는 나에게 닥친 이러한 현상을 심리적,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수시 무시로 마음의 지옥 고통을 겪으면 몸의 지옥 고통은 어떻게 작용되며 수용되는가 하는 상념에 젖게 된다. 이러한 엉뚱하고 다소 오만한 상상은 나에게는 현상과 현실에 대한 대탈출구인 셈이다.

  짐짓 식탁보로 사용하는 다포(茶布)에 새겨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글귀가 눈에 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볼 때마다 위안이 된다. 그러나 앞으로 걷지 못하는 고비마다 나는 어떻게 이를 타개할까.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필경은 “이제 다시는 걸을 수 없다.“라는 현실이 나를 가로막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는 1차적으로 병원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움도 영원히 가지는 않을 것임을 나도 잘 안다. 그 후를 대비해야 한다. 나는 일단 이동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주거환경으로 옮길 것이다. 그리도 그 장애의 정도에 따른 보장구를 최대한 확보할 것이다. 가벼운 탈 것에서부터 최첨단 전동휠체어, 아니면 차에 아주 편리하게 탑재할 수 있는 기구도 장만할 것이다.

  이번 가을로 접어들면서 나의 병증을 진료하기 위해서 자주 서울 병원으로 내왕하게 된다. 서울 딸네 집에서 길게는 열흘 넘게 부터 일박이일까지 묵으면서 사전 진료, 검사, 수술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 일 년 아니면 몇 달을 이른바 “서울 살이” 방식의 낭만적 심성에 젖어서 지내고 싶었지만 몇 차례 진료를 위한 병원 방문 등 팍팍한 일정은 마치 내 하초 저림 같다. 이러고 보니 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후배 ㅈㅎ이 떠오른다. 뇌졸중으로 벌써 30대에 반신불수가 돼 힘겹게 걷는 그의 모습이 자꾸 내 모습에 겹쳐진다. 그의 발병 초기에는 내가 그의 부탁 혹은 나의 자발적인 뜻으로 원근에 용하다는 뇌졸중 장애 회복 침구 의원을 수차례 동행해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등에 침을 꽂아서 피가 방바닥에 흥건히 밸 정도라도 참았던 그의 심중이 이제야 좀 이해된다.

  허기야 나도 8년 전 아직 내가 현직에 있을 때 6개월 동안 일주에 두 번씩 한방치유를 위해 무려 스무 대 가까이 되는 침의 통증을 감내했었다. 당시 시술이나 수술의 부작용, 재발에 대한 걱정들이 너무 많아서 침구로 치유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등허리에 가늘고 길게 내리 꽂는 봉침, 그리고 마지막 두세 번 놓는 신경침은 그냥 고문 같았다. 그것은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보왕삼매론의 다음 글귀가 마음에 다시 와 닿는다.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障礙)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비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解脫)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많은 통증을 체험하는데 마음의 통증이 더 힘들까, 몸의 통증이 더 힘들까 하는 것은 아주 우문(愚問)일 수밖에 없다. 말기암 환자의 지독한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더러 듣는다. 환자 본인도 본인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보호자가 더 못할 노릇이라고 들었다. 나는 아직 그런 몸의 통증은 몸소 당해보지 않아서인지 왠지 마음의 지독한 통증, 마음이 지옥불 같은 통증이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견디지 못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보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역시 보왕삼매론의 다음 글귀를 마음에 새기면 도움이 될까. “수행하는 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誓願)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魔群)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2022.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