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혼자 걷다, 그 둘째 날 이야기
청솔고개
오늘 점심은 닭 가슴살 구워서 먹고 빵에 잼 발라서 산행과 낚시 함께 해 볼 거라면서 야심차게 출발했다. 하루 쉬고 충분히 스트레칭 한 뒤 낮 더위 피해 저녁 무렵 산행을 하려는데 비가 듣는다. 살짝 망설여진다. 그러나 오늘 포기하면 영영 산행을 못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 출발했다. 그래서 비옷도 준비했다. 들머리에 내려서 출발하려는데 비가 멎어서 이런 나의 몸 상태로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무게를 줄인다는 기분으로 비옷과 삼단우산을 차에 두고 발을 떼서 십여 미터 가는 데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아서 다시 가서 챙겼다.
오늘도 첫날 못지않게 힘들었다. 어제보다 더 상태가 악화돼서 낙우송 숲까지 가는데 거의 서른 번 정도 허리 젖힘을 했어야 했다. 다리 저림에 절망감이 깊이 새겨진다. 낙우송 숲 바닥은 전보다 좀 말라있었다. 좀 있으니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나고 남자 넷이 내려오고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산에서 사람 만나는 것도 순간적으로 약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혼자만의 저녁 식사에 전념했다. 뿌리 약한 레드우드 종의 이런 나무들은 약한 바람에도 뿌리가 잘 뽑힌다. 지난 가을 태풍에 넘어진 것도 있고, 더 오래돼 그 형해(形骸)만 겨우 남은 것도 있다. 언젠가 나도 이 나무처럼 뿌리 뽑혀져 가로 누워 육탈의 과정을 겪을 날이 올 것이라 생각이 된다. 내 육신과 결국 흙과 물과 바람과 불로 돌아가리라. 나는 아직은 번듯한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준비해 간 저녁을 먹는다. 저 멀리는 얼마 전에 내가 올라타고 꿀려보니 천성 목마로 둔갑해서 동행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던 긴 나무가 오늘은 가로로 누워서 나를 보고 있다.
오늘 올라오면서 허리 젖힘 끊임없이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녕 이제, 그 유년의 마음 평화 경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인가.’ 이런 화두는 벌써 중2년 겨울방학 때, 대학 입학했을 때, 혼인 직후, 목 돌아가는 증세 겪을 때, 아내가 부모님과 심한 갈등을 겪을 때, 1차 약물치료와 상담치료 전 한 달 기간 동안 등 내 삶의 고비마다 자신에게 물었던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오늘 또 그런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나는 내 생을 다하는 날까지. 나는 나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누구보다 잘 자신해 왔었지만 아픈 마음의 그 진폭은 넓었었다. 대학 2년 봄 가슴앓이 앓기 시작한 후 탐닉한, 음울함을 더욱 일반화 시키는 작품으로 여겨졌던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류, 해맑기 짝이 없었다고 느껴지는 헤세의 수필 류, 대학 4년 마지막 겨울방학 때 육체적인 절망상황에서 극심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본 영화 “빠삐용”에 나의 마음을 의탁했던 시절이 또 반추된다. 그때마다 겨우 이런 일에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끔은 나를 일으켜 세워 주는 것 같다. ‘나는 강하다. 누구보다 강하다. 특히 멘탈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멘붕이 와서는 안 된다’고 얼마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봤던가. 오늘 이 순간 이후 나의 이런 마음의 행로를 더욱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출해야 한다는 것도 새삼스레 각인된다. 이 모든 것도, 즐거운 마음도, 기분도, 슬프거나 답답하거나 죽고 싶은 절망의 마음도 결국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의 숨결, 나의 웃음, 나의 재치기처럼. 그러니 내가 감당해야 할 것으로 결국 나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먼저 간 한 친구가 가끔씩 떠오른다. 그가 어떤 마음이었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오늘 마음먹고 잘 준비해간 미끼와 릴 사용 법 숙달하기 위해서 결국 근처 저수지에 갔으나 날이 너무 저물었었고, 못의 낚시 금지 안내 등으로 아쉽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해 저무는 호수의 풍광을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밤꽃이 곳곳이 아주 연한 연두색으로 피어나면서 진한 향을 풍긴다. 정녕 여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2021년 초여름 어느 날] 2021.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