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흥성한 잔치를 마치려고 하니 고향 마을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이 봄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회한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 같다. 뭔가 속이 들끓는다. 이제는 마쳐야 할 시간이다. 두 손을 붙잡으시며 하루 자고 가라고, 자면서 옛날 얘기 좀 하자고 어머니 동무들이 간청하신다. 그러나 어머니는 잘못된 수술로 뒤틀어진 허리 ,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세와 거동 때문에 갑자기 바뀐 잠자리를 결코 감당할 수 없으시다. 이를 잘 아는 어머니는 붙잡는 동무들의 손을 더욱 다정히 잡으시다가 놓으면서 결국 차에 오르셨다.
저만치쯤 이제는 마을 모두의 상수원으로 변한 우리 집 작은 삽짝 옆 공동 우물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간 흘러간 세월을 말없이 보여준다. 우리 집 흙담벼락과 대나무 울타리를 따라 촘촘히 심어져 있었던 감나무, 대추나무, 감로나무, 꽤똥나무는 그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게 사라져버렸다. 여기 쯤 채전밭 , 그 아래가 미나리꽝, 그 북쪽 왼편이 큰 채, 그 앞이 마당, 그 옆이 사랑채, 그 너머 마닥……. 내가 이럴진대 이 모든 걸 가슴에만 담으시는 어머니의 심중은 또 어떠하실까 싶다. 당신의 그 추억과 회한을 내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그냥 잊어져 가는 세월에 묻혀 사는 우리 엄마가 오늘 세월을 뛰어넘은 만남, 환대, 헤어짐에 얼굴마저 상기되셨다.
하늘의 옥황상제도 불버한다는 행복했던 신혼, 새댁의 세월을 보내신 어머니의 이 마을, 이 골목, 저 언덕, 앞 들판, 뒷마을 등 모두 이름도 정겹다. 솔고개, 딱밭미테, 섯갓미테, 학교산, 맞도랑, 개안들, 하바데, 새들, 홈바데, 비각거리, 앞들, 쇠비산, 뒷각단, 숯가막골, 골안, 소뜨방산, 능고개, 능갓, 진등바테, 능골세, 장골세, 바뿌재갓, 무지당, 짐점 등 정다운 고향 마을 곳곳의 이름과 그 자리가 아직도 선연하다. 멀고 먼 그 시절이 손에 잡힐 듯 여기 가까이 있는 것 같다. 202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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