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행은 우중산행이다. 문득 ‘비가 와도 떠납니다.’하는 지난 날 답사 모임의 캐치프레이즈가 생각난다. 천년의 바람 소리 대신 빗소리가 스며드는 대숲을 출발한다. 바다, 못, 강, 계곡의 깊은 물에 몸을 담가 본 적이 족히 20년은 더 된 듯하다. 아내의 햇빛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신혼 초 캠핑이나 해수욕 두어 번 갔었고 나중에 아이들 꼬맹일 때 물놀이 가끔 가 본 기억밖에 없다.
오늘 이 비 맞고 떠나면 그 길은 바로 나의 물놀이 터이다. 바로 천연 물맞이다. 자연에 가장 잘 몰입할 수 있는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이 오솔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레 빛을 차단하고 수중 코스로 잠수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계곡이나 바다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든다. 누가 나의 이 짓을 보면 참 엉뚱하다거나 술 취해서 하는 행태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나는 왠지 맑은 날보다 흐린 날, 흐린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좋았다. 그런 날이 더 기다려지곤 했었다. 비가 오면 나의 우울감정이 그 빗속에 모두 쓸려 가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런 성향이 평생 이어지고 있다. 담장의 기왓장이나 돌을 감아 올라가는 호박잎에 퍼붓는 소나기나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는 내게 자연의 교향악이다. "투둑, 투둑, 투두둑", "탁탁, 타다닥"하고 호박잎은 둔탁한 소리, 양철지붕은 더 맑은 소리다.
지금 나는 우산을 쓰고 산행을 하고 있다. 더욱 아늑해진 오솔길에는 빗물에 씻겨서 반짝이는 옥돌 조각이 꽃이파리로 져 있다. 어린 시절 살굼살면서 닳고 닳아 보석처럼 곱게 다듬어진 사금파리 같다. 한밤의 정화수로 고이 씻은 처녀의 얼굴이나 새벽이슬에 젖은 수선화다. 땅에 떨어져서 발길에 차이는 거뭇거뭇한 솔방울은 툰드라 지층 탐색 하면서 찾은 갈탄이다. 풍요함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가다가 가다가 계곡을 만나면 땀에 전 얼굴을 헹군다. 얼굴을 씻고 나면 일대가 그 삽상함과 상쾌함이 비할 바가 없다. 최고의 기분이다.
문득 어린 시절, 비만 오면 물이 가득 찬 마당에 어른들이 신던 나막신을 끌고 질벅질벅, 철벅철벅 종일 물 튀기던 기억이 있다. 그게 참 재미있었다. 가끔은 마당 못에 미꾸라지나 송사리가 눈에 띄면 더욱 신이 났다. 이제 아내나 아이들은 이런 습벽을 죽어도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내가 물을 피하지 않고 물 가운데를 저벅저벅 걸어가면 그들은 질겁한다. 그러면 나는 모른 척하고 더 그리한다. 내가 심하게 그럴 때는 그네들은 짐짓 화난 얼굴을 한다. 2023.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