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마음이 어지러우면 나도 모르게 산행이다. 가는 길 양옆에는 오래된 절터에 풀이 자부룩하다. 그 풀밭의 풍요로움을 생각하니 문득 어린 시절 소먹이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집 우공(牛公) ‘아리랑스리랑’과 그 어린 것을 여기에 풀어 놓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다.
아침 8시도 안 돼 내리는 햇살의 두께를 보니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멀리 숲의 머리에는 엷은 안개가 서리고 있다. 황화코스모스가 막 피어나기 시작한 남천 물줄기 여울목 위로도 가을 안개가 피어나고 있다. 마치 늦봄 먼 들녘에서 보릿단 태우는 연기처럼 보인다. 그 보릿단 태우는 냄새는 마침내 한여름 대지가 앓고 있는 열병(熱病)의 종언을 시사한다. 또한 내 어린 날 홍역에서 해열(解熱)될 때, 내 이마에서 느끼는 서늘한 땀내 같다.
대지는 이제 막바지 노염의 옥죔으로 더욱 말라가고 단단해지면 갈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골드미스와 골드미스터의 감당하지 못하는 히스테리 같다. 악성 신경증이다. 이제는 큰물이 오솔길을 타고 내리면서 스며들어 뭉개지고 흘러내려 버리는 흙 마그마 현상은 걱정 안 해도 되리다. 배낭에 달아 놓은 밤송이나 혹은 내 정수리 가장자리에는 고추잠자리가 연착륙하려고 하늘거릴 것이며 그 날렵한 춤사위를 지겹도록 목도할 때가 멀지 않았으리라.
지난날 자연주의여행자들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뚫고 끝없이 걸었다. 마치의 대지의 끝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그들이 걸으면서 닳아서 버린 신발이 몇 켤레였던가. 헤지고 터진 옷이 몇 벌이이었던가. 그들은 걷고 또 걷는다. 그들은 빗길을 걷다가 도 해가 나면 나는 대로 옷이 마르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온몸을 웅크리고 걷고 또 걷는다. 그 길은 구도의 길이고 한 발짝 한 발짝은 명상과 순례다. 2023.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