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n Here

두고 갈 게 있다, 시간이 멈춘 곳에

청솔고개 2024. 12. 25. 00:55

                                                                                      청솔고개
   오늘은 내가 척수농양증으로 입원한 지 6개월하고 4일째다. 그 많은 날을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내가 생각해도 대견하고 신기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치 마취제 같은 '카피라이터'에 현혹돼서 그리 버텼다고 생각하고 싶다. 째깍째깍 시간은 이 순간도 쉼없이 흘러가는 법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과 세월이 강물로 흘러 바다에도 이를 것이리라.
   그날 새벽, 하지가 마비돼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구급차로 고향을 떠나올 때는 내가 이렇게 오래 여기 이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치료와 회복이 어떻게 되든 적어도 서너 달 안으로 거취가 결정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날 이후로 고향의 우리 집과 세를 준 큰집은 그대로 시간이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외관을 일부 꾸미는 조건으로 가게로 세를 준 큰집의 2층에는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컨테이너라도 빌려서 보존해야 하는 자료, 곧 유품들을 모아서 포장으로 덮어 놓았다. 그새 그게 어찌 됐는지, 혹 버려지지나 않았는지 하는 절박함이 있다. 내가 병원에 묶여 있으니 세 든 사람에게 전화로 알아보기조차 두렵고 성가시다.

  두 분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동생들과 아이들의 유치원, 각급학교 앨범.  아버지 법사 공부할 때 장만한 목탁을 비롯한 손때 묻은 일상용품. 어머니의 66년 살림살이 평생이 담긴 그릇. 시집올 때 장만한 고풍스러운 옛날 장롱. 그 속에 넣어놓은 족히 100년은 묵었을 베틀의 북. 쌀을 되는 됫박….


   나머지 것들은 속으로는 가슴앓이하면서, 가슴을 쓸면서, 수집하는 사람의 손에, 혹은 철거전문업체의 트럭에, 헌 물건 되사는 업체의 야적장에 넘겨 주었다.
   어머니의 분홍 치마저고리, 아버지의 기지 두루마기, 기제사 때 착용하시던 도복, 망건은 처분했다. 어머니 시집오실 때 가져와 간직한 사성단지는 보존한다. 재봉틀은 처분. 품목이 많기도 하다. 아마 내가 이렇게 쓰러지지 않았다면 버린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내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고도 남았으리라. 내가 쓰러지고, 끌려 태워지고, 수술하고, 침대에 앉는 연습부터 시작하니 그때는 이런  집착에 대한 모든 인식은 공(空)과 허(虛) 그 자체였었다.
   지금 이르러서야 가장 큰 미련으로 남는 것은 아직도 내 키의 가슴팍만큼 높이의 차곳독을 비롯하여 지금은 그때의 방식으로 제작하지 않아서 보물 취급을 받는 큰 단지 몇 개를 새벽에 고가사다리까지 준비해서 내보내 버린 것이다. 그때 세입자의 집 구조 개편이 바뀌어 2층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아도 될 상황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황망히 다른 많은 단지나 독을 내보내지 않아도 될 터였을 것이다. 지금에야 "아아!"하고 장탄식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 닿겠는가.
   그런데 나의 이런 병적인 집착 벽은 어디에서 연유가 되는가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극도의 아쉬움과 미련의 감정은 내가 일단 불멸한다는 전제하에 모두 성립됨을 처음부터 알았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가 지금에야 조금씩 현실 인식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그날 척수의 고름 덩어리 감염으로 폐렴, 퍠혈증으로 식물인간, 혹은 사망의 상태에 이르렀다면 큰집에서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많은 유물에 대한 나의 인식과 집착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또한 그 집착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 유지보관만 된다면 후세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될 가능성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고향의 집 근처 고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처럼, 결국은 흙 속에 묻히더라도.
   우리 형제는 셋이나 되지만 후사(後嗣)가 이어질 전망은 난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이 짐 덩이 같은 유품들을 맡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혹 내가 이 세상 결별 시 소중한 유언으로 남긴다 해도 그것이 지켜질 가능성은 희박하며 또한 내 사후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다시 고향 마을 큰집 장원(莊園)이 생각난다. 참 안타까운 것은 고향마을 집을 처분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시내 집으로 모시고 오신 그즈음, 내가 자라면서 큰집에서 보아왔던 주요 품목들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입대 후 첫 휴가 때 고향 장원이 철거돼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장원이 철거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내 아버지의 집으로 옮겨오셨다. 아버지의 집이 장원에 비할 바 없이 좁지만 그래도 옥외 추녀 밑이나 옥상 공간이 있는 주택이어서 그나마 쇠 절구, 돌 호박, 서답 돌이 옮겨질 수 있었으리라. 어릴 때 내가 들어갔더라면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만큼 우람했던 차곳독 등의 보존도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때 이사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그 큰 차곳독을 2층 옥상으로 옮기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 넓은 장원을 고속도로 연변 미화사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구실로 철거해 줄 수 밖에 없었다. 면사무소 등 관의 끈질긴 압력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결국 모든 걸 마을 회관 부지로 마을에다 넘기고 난 뒤 남은 가재도구, 농기구 등을 쓰레기로 남겼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그것들을 태운다고 며칠 동안 연기가 피어올랐다는 아버지의 생전 말씀, 그러시면서 그때 당신이 아무리 관의 압력, 동네 사람들의 강권(强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장원을 처분한 것은 너무 성급히 판단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같은 조건의 다른 몇 집은 억지로 버티어서 다 보존하였다고 했다. 그 말씀으로 보아 아마도 당신은 나보다 몇 배나 더 그러한 터전과 물품에 대한 애정과 미련을 지니고 있으셨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그 물품들은 그분들이 평생 길삼, 부엌살림, 농사일로 한시도 손에 떠나지 않았던 손때 묻은 것들이었다. 그러한 그분들의 심중을 한순간에 모두 세월의 망각 속으로 묻어버린 셈이다. 지금 장원 그 자리는 그냥 마을 회관 건물과 마당으로만 남아 있고 당시 내가 오르락내리락했던 감나무며, 참새가 재잘거렸던 대나무 밭은 그 흔적이나 위치조차 가늠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시내 큰집 처리만큼은 그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집을 정리하면서 사라지는 많은 품목들을 영상으로 남겨 두었다.
   애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2년 후 큰집 세를 내 줄 때 그냥 고집스레 보존해 버릴까, 아니면 실리를 찾아 세를 내 줄까 하는 양가 감정로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 집을 그대로 다시 정비해서 모든 자료와 살림을 잘 보관하자. 혹 내가 힘이 다해서 불가항력으로 폐허가 되더라도 고향 장원과 고향마을에서 옮겨온 독, 장롱, 살림살이 등을 통한 우리 집의 역사와 추억을 그대로 보관하게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가장 존귀하다는 인체도 언젠가는 한 줌의 뼛가루로만 남는데, 일찍이 모든 유형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비워주자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나 혼자만 있었다면, 아들과 아내의 이견이 없었다는 전제하에는 나는 전자를 선택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후자를 선택한 아내와 아들은 또 그 현실적인 이득인 사글세 수입에 대한 매력 역시 포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내가 이빨 뿌리의 농양 등으로 발치 등 각종 통증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또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유물보전과 사글세 수입 중 하나를 택하는 문제이다.
 

   지금은 포장으로 어설프게 덮어 놓은 자료들이 그동안 잘 유지되고 있는가 걱정이다. 내가 이렇게 단 하루도  고향행을 할 수 없는 거동 불편 상황이니 이런 문제들이 그렇게 묻혀가는 것 같다. 내가 아내한테 틈만 나면 공언했던 게 있다. 우리 가문의 주요 자료 보관용 컨테이너 설치다. 나의 거동불편으로 이것이 한낱 공념불로 그칠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내가 거동만 좀 자유로워지면 퇴원하는 대로 선산이나 우리 전답 귀퉁이에 농막삼아 컨테이너를 설치해서 여기 포장으로 덮어둔 자료들을 정성껏 보관하고 싶다. 나는 그 안에서 작은 책상 하나에 노트북 비치해서 독서와 집필 공간으로 삼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다만, 만물은 영원한 게 없으며 언젠가는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진다는 그 생각은 내 가슴팍과 뇌리에 묻어 두고 있다.
                                                                                 2024.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