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사마귀
한날 저녁에 내가 있는 52병동 서쪽 끝 베란다 유리 사이에 사마귀 세 마리나 보였다. 아내가 이 사마귀를 보는 순간 질겁을 한다. 여자 보호자 하나도 호들갑 떨 듯이 놀란다. 나는 생각해 본다. 사마귀는 별로 해를 끼치지 않은 곤충인데도 사람들에게는 왜 그리 밉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이 두 가지 속설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사마귀를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그 독이 옮겨져서 눈이 멀어진다는 설, 다른 하나는 숫사마귀는 짝짓기한 후 암사마귀에게 잡아먹힌다는 생태 때문일 것 같다. 왕사마귀는 작은 설치류까지 잡아먹는 그 육식성의 포악함도 있다고 한다.
우리 병실 바닥에 나타난 사마귀는 그렇다고 함부로 밟아 없애버릴 수도 없어서, 그 처리를 두고 모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중국 무술 쿵푸[功夫]의 한 권역인 당랑권이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는 자세에 유래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병실 바닥에 굵은 눈알을 굴리고 굼뜨게 슬금슬금 몸을 옮기고 있는 이 녀석에게는 그런 무술의 기원이 영감 같은 동작은 찾아볼 수는 없다. 나도 가까이 가서 만지기는 뭣해서 아직은 내가 아주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내 지팡이에 사마귀를 옮겨붙게 하여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놓아주었다. 병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런데 사마귀가 며칠 후 또 한 마리가 발견됐다. 이번에는 우리 병실 침상 아래였다.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보고 불쾌해한다. 전번에 창밖으로 내보내 준 사마귀와 같은 크기였다. 이상하다. 사마귀도 온 대지를 들끓게 하는 염천을 피해 에어컨이 빵빵한 이 병실로 숨어들어왔을까? 전번에 내보내 준 사마귀가 운동장의 풀밭까지 가지 못하고 다시 베란다를 빙빙 돌다가 서쪽 이중 보안 창틈으로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이 녀석의 처리가 또 당면 과제가 됐다.

우리 고향에서는 사마귀를 여물가시라 한다. 어떻게 이런 말이 생겨났나 싶어서 알아보니 연가시에서 유래된 듯하다. 연가시는 마치 가는 나뭇가지처럼 생긴 수생곤충인데 이 사마귀가 여기에 알을 붙여놓은 데서 생겨난 말 같다.
길에서 다른 곤충들은 행인들과 맞닥뜨리면 본능적으로 튀어 달아나기에 바쁜데 사마귀는 그 퉁방울 같은 굵은 눈을 굴리면서 아망스럽게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행태 때문에 그 밉상처럼 악명도 얻은 것 같다.
이제 9월이다. 생존을 위해 폭염을 피해 병실에 스며든 사마귀와의 잠시의 공존에 즐거워 한다. 신나 하거나 즐거워할 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을 병실에서 내가 찾아낸 작은 이벤트다. 그러면서 나의 걸음걸이가 아직은 당랑거철(螳螂拒轍) 기개의 주인공인 사마귀에도 훨씬 못미친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씁쓸했다.
귀뚜라미
며칠 전 병실 복도에 뭔가 작은 게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게 보인다. 아내는 그것이 무엇인지 잽싸게 간파한다. 귀뚜라미다. 아내는 행여나 이 가을의 전령사가 무심한 병실 복도의 보행자들에게 밟힐까 봐 걱정이 크다. 그러나 태반이 휠체어로 이동하는 이 병실 공간에서 이 미물 하나 배려할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아내한테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귀뚜라미나 바퀴벌레는 그 색깔이나 외양이 비슷해 보이는데 이를 대하는 반응이 왜 그렇게 상반되느냐고. 그 차이라면 귀뚜라미는 폴짝폴짝 뛰는 데 비해 성체 바퀴벌레는 날기도 하는 것인데 그 때문인가 하고 물었다. 아내는 대답한다. 귀뚜라미는 귀엽게 생겼고 바퀴벌레는 흉측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그 대상의 외관 때문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생활사에서 켜켜이 축적돼 온 행태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바퀴벌레나 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아무래도 이런 동물들이 인간과 밀접한 생활반경을 공유하면서도 인간에게 어떤 해를 끼치어왔다는 것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쥐는 그 반들거리는 눈 때문에 영리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12지신 띠에서 첫 순이 바로 쥐다. 그런데 같은 쥐의 이름을 단 다람쥐는 또 어떤가. 집쥐와 다람쥐에 대한 인상 평가는 정반대다. 왜 그럴까? 박쥐는 또 어떤 인식이고 인상인가. 들쥐와 새앙쥐에 대한 인식은? 컴퓨터 작동에서 중요한 부품을 하필 새앙쥐[생쥐], 마우스로 작명한 게 놀라운 역발상 같은 것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의문을 끊임없이 지녀본다. 오늘따라 폴짝폴짝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가을의 전령인 귀뚜라미의 자유로운 행보를 지켜보다가 살짝 손바닥을 둥글게 말아서 귀뚜라미 한 마리를 양손으로 가두어서 다시 밖으로 내보낸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귀뚜라미 몸체의 감각이 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진다. 나는 언제 저 귀뚜라미 도약의 반이라도 흉내 낼까 생각하니 다시 아득함에 빠져든다.
202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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