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단상3, 입영열차 전후
청솔고개
유월이 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선명한 기억들.
입영 통지서를 받고 초임 지의 아이들과 생애 최고의 이별 의식을 치른 후, 고향 집에 와서 이틀 정도 쉬었다.
드디어 유월 하순의 어느 날.
오늘은 입대하는 날이다.
내가 사는 한반도의 동남쪽 일대의 장정들은 모두 포항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10시까지 집결하도록 영장에 기재돼 있었다. 할머니, 막내 종조모님, 어머니, 숙모님 등 우리 집안에 여자 분들이 총 출동, 나의 입대를 환송해 주려고 다 동행하셨다. 내가 맏이이고 집안의 장손이라서 대접을 해서인가. 그 땐 당연히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내가 참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 여인들은 다 가시고 안 계신다. 어언 44년 세월이 흘렀는데……. 오늘 따라 그 면면이 더욱 그리운 정이 서린다.
집결 후 인원 파악을 하고 난 다음, 오후 5시까지 자유 시간이었다. 5시까지 근처 포항역 광장에 집결하도록 지시 받았다.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니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가까운 송도해수욕장에 가서 용기내서 보트를 탔다. 오늘은 어른들이 아마 추억 쌓기라도 하기 위해서 나한테 최대한 선심을 쓰시는 것 같았다. 어제 고향의 친한 친구 하나가 동행한 가운데 동네 이발소에서 군인머리로 짧게 깎은 내 머리 스타일이 아직은 낯설었다. 거울이나 창문에 비칠 때마다 내 얼굴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까까머리로 다시 돌아간 듯하였다. 가뜩이나 빈약한 나의 얼굴이 더 빈약해 보였다. 그래도 3년간은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마음 준비는 해 보았다.
이제 포항역 광장에 장정들과 가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입영열차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도 걸어서 역 쪽으로 갔다. 머리 깎은 장정들과 그 배웅 객들로 길이 넘쳐나는 것 같다. 드디어 낮에 보았던 <호송> 등 완장을 찬 관리 장병들이 다시 인원 파악을 하고 역 구내로 안내한다.
나는 그때 우리 집안의 네 여자 분들과 일일이 손잡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모든 분들마다 가벼운 포옹이라도 해 드렸으면 했는데 늘 아쉬웠다.
열차에 올라오니 대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른 바 <호송>들의 군기잡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벌써 누가 누군지도 헷갈릴 빡빡머리들은 모두 졸아 드는 표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그런데 내 바로 옆 어떤 장정은 아까부터 연신 창밖으로 내다보며 팔이 떨어져나가라고 손을 흔들어 댄다. 목청이 쉬도록 소리쳐 댄다. 창 밖에는 어떤 참한 아가씨가 밖에서 거의 울상이 돼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서로 애인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입영 열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출발한다. 스르르 미끄러진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내가 입영열차를 탔구나. 정말 군대 가는구나.’ 나직이 소리 내 보았다. 아까부터 역 광장에서 연주하던 고적대의 환송의 곡 때문에 더 비장해진다. 비장미를 느낀다.
그 아가씨도 같은 속도로 따라온다. 이 장정도 연신 뭐라고 거의 미칠 듯이 소리친다. 아마 “잘 있어라, 몸조심하고, **야!” 인 것 같다. 입영열차 내는 이제 거의 군대 내무반 분위기다. 모든 게 경직돼 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호송>의 통제가 쉬운 것이다. 그 장정은 <호송>의 몇 차례의 심한 구박에도 불구하고 창가에서 그 행동을 중지하지 않았다. 그 아가씨가 쫓아오다가 그냥 멀어지니 절망하는 표정으로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장정의 그 표정을 잊지 못하겠다.
입영열차는 포항에서 경주로 향한다. 근처 형산강 모래톱에 두루미 몇 마리가 한가롭게 노니는 게 보인다. 입영열차가 경주역 구내로 진입했다. 그런데 또 하나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진다. 아까 창문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그 아가씨가 구내에 들어와서 어느 새 그 장정이 있는 창문 옆에 와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두 발로 달려왔을 턱은 없고, 옆에 다른 장정이 ‘택시 타고 여기까지 따라 왔구먼’ 한다. 허참, 그냥 봐서는 내가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 보다 강렬했고 애틋했다. 어쩌면 사랑의 힘이 저토록 강렬할까 싶었다.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영천역, 대구역까지 그 아가씨가, 장정의 애인이 이런 식으로 택시를 대절해서 따라 부쳤다는 것이다. 훗날 훈련소에서 귀동냥 해 들은 건데 그 아가씨가 아마 대전까지 따라 부쳤다나…….
나는 그 영화 같은 장면 목격에 빠져서 입대를 앞둔 나의 불안함, 외로움, 비장함 같은 것은 싹 잊을 수가 있었다. 마치 그 아가씨의 애인 장정이 내가 된 것처럼.
입영열차가 대전을 지나고 논산 지나 연무대역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지났다. 사방은 멀리 비쳐오는 훈련소 불빛 외에는 깜깜했다. 하늘의 별들이 더욱 빛나 보였다.
우리는 급조한 대오를 갖추어 더블 백을 어깨에 메고 찻간에서 급히 배운 행진곡 같은 군가를 소리치며 보무도 당당하게(?) 정문으로 향하여 한참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 논 두름 같은데 뭔가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 않는가.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소린지 난 알아 듣지 못했다. 그때 문득 아까 찻간에서 <호송>들이 강조하는 게 생각났다. 절대 건빵을 주지 말라고. 아하! 그거로구나. 첫 입영열차에서 지급하는 건빵이 입에 맞지 않은 게 태반인데 마침 저런 동네 아이들이 새벽 2시임에도 불구하고 잠 안 자고 건빵 봉지 얻어먹으려고 달라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 아이들은 건빵 얻는 재미로 입영열차가 도착하는 날은 새벽 2시까지 저러고 있는 게 썩 좋아 보이는 않았을 터이다. 그런 버릇을 고쳐주려면 건빵을 건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둠을 향해 건빵 봉지를 던지는 소리가 들린다. 퍽 퍽하고 봉지 닿는 소리다. 그 논 두름의 아이들이 아직도 어려웠던 우리의 70년대 중반을 자랐던 아이들이었음을 내가 한참동안 간과했었다.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었다.
그런데 나는 그 건빵이 참 맛이 있어서 내가 먹기도 모자라 던져 주지 못했었다.
논 두름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만 멀어져 간다. 2020.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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