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유월의 어느 하루, 꽃과 동행하다/그래도 가는 데마다 꽃들의 미소에 나는 힘을 얻는다

청솔고개 2020. 6. 15. 07:03

유월의 어느 하루, 꽃과 동행하다                                                                                                    

                                                                                 청솔고개

 

   헤세는 그의 수필집 ‘삶을 견뎌내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통을 잘 이겨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그 방법으로서 ‘사소한 기쁨’의 체득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절제된 행동 습관”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의 근원적 해결 방안으로 다음과 같이 설득하고 있다. “그런 기쁨들 가운데 가장 으뜸은 우리가 날마다 자연을 접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이다.”이라고. 아버지와 올해 들어 두 번째 ''병상 동행 여행' 출발한 지 오늘이 6일째다. 일상의 여행에서 맘껏 호흡하던 ‘자연’이 벌써 그리워진다.

   오늘 우리 세 식구 산행 하는 날. 새벽에 깨서 잠을 설쳤더니 좀 피곤하다. 오늘은 또 병원에서 하루 세월을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어떻게 위무해 드리나. 마음이 무겁다. 아내는 아이를 만날 때마다 거의 뭐 하나씩 큰 것, 작은 것 주려고 싸간다. 그게 엄마 마음인가보다. 첫 쉼터까지는 오늘도 힘들었다. 어제 친구들과 지팡이 없이 한 산행이 자세를 망쳤는가. 이어서 오늘 산행 시작 자체가 무리였나 싶다. 아이가 또 조언을 한다. 때로는 나를 위하는 이 조언이 살짝 잔소리로 들린다. 그러면 내 응답의 어투가 살짝 달라지나보다. 아이는 용케 그걸 간파한다. 아내는 조용히 중립을 지킨다. 그러면 벌써 늦었다. 아뿔싸. 내가 또 예민한 아이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오늘도 그래서 한 동안 침묵.아이가 먼저 뒷말을 이어 나간다. 이건 아이의 자연스런 수습책이다. 현명한 아이다. 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어 간다. 이제는 됐다. 오늘도 이런저런 주제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월요일 이른 시간이라 산행하는 이가 거의 없다. 그런데 벌써 더워오기 시작한다. 땀이 막 쏟아진다. 이런 건 이십대부터 내가 빠져들곤 하던 좋은 정신 환경 아니었던가. 자학에 빠져들어 정신의 평화를 찾는다는 식이다.

   오늘도 고향 마을을 바라본다. 멀리 솔고개가 한 점으로 찍혀 있다. 다시 돌아내려 온다. 오늘따라 오가면서 싸리 꽃을 자주 만났다. 내 청년 시절, 문경새재를 오르면서 절망과 동행했던 작은 떨기의 올망졸망한 얼굴들이 참하다. 오늘은 그동안 낙엽송(落葉松)이라고 알고 있었던 숲은 낙우송임을 확인하였다. 같은 침엽수이지만 잎이 다르다.

   낙엽송의 뾰족뾰족한 침 대신 마치 부드러운 비닐로 만든 빗살처럼 부드럽다. 그 빗살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그 부드러운 햇살은 아주 몽환적이다. 달빛 아래 같다. 거기 바위에 앉아서 쉬었다. 여기는 2년 전 아이와 처음 산행 때 커피 한 잔 하던 쉼터였다. 계곡의 물은 나날이 거의 다 말라간다. 내 속도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그 많던 가재와 도롱뇽은 살아나 있을까. 마사토 모래 속 깊이 숨어들어가서 겨우 목숨만은 보존하고 있을까. 묘비가 닳아서 글자마저 희미한 무덤을 지나간다. 어쩐지 토끼 똥 내음이 풍기는 듯 한 토끼풀꽃의 맑은 그늘. 꿀벌들이 잉잉거리는 반짝반짝 자줏빛 윤이 나는 꿀풀. 이름만큼이 거친 가시를 가진 가시엉겅퀴. 어쩐지 뱀이 좋아해서 곧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 만 같은, 새빨간 과육으로 토실토실하게 뭉쳐진 뱀딸기. 이 중에서는 멀대같은 망초가 무덤가 풀밭에서 무덤 주인의 가장 좋은 말동무가 됨직해 보인다. 무덤의 더욱 양지바른 곳에는 띠가 하얀 꽃을 달고 있다. 좀 있으면 자줏빛 열매가 달린다. 어린 시절 풀밭에 누워 띠 열매가 달린 대를 뽑아서 장난을 친 기억이 난다. 동무한테 띠 열매의 대궁이를 이빨로 물고 눈을 감으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고 속인다. 이빨로 지긋이 무는, 그 순간 확 잡아 당겨버리면 입안은 온통 잘디 잔 띠 열매로 그득해진다. 청빈을 자랑하는 옛 선비들은 산속에서 이 띠로 만든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바로 띳집, 모옥(茅屋)이다. 옛 사람들은 우장(雨裝)도 이 띠로 만들어 쓴다. 도롱이라고 한다.

   큰길로 나오는데 시골집들의 담 밑에는 6월의 아름다운 꽃들이 경연을 하고 있다. 양귀비는 이름처럼 화려하고 다소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임금을 기다리다 결국 죽었다는 어느 궁녀의 이름 소화에서 왔다는 능소화는 어쩐지 그리움, 기다림의 꽃말처럼 애잔한 느낌이 든다. 내가 가장 사랑하던 달빛 아래 수선화는 이제 자취도 없다. 큰길로 나온다. 길 옆 오른쪽 천변은 온통 금잔화 꽃밭이다. 온천지가 금빛 술잔으로 덮여 있다. 금잔화의 아름다움에 나부터 취할 것만 같다. 문득 아이가 말한 게 생각난다. 아이는 스스로 소년기에 게임에 너무 몰두해 버려서 전두엽에 감성 기능이 약화된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꽃을 보아도 고운 줄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너 만할 때는 그랬던 것 같다고. 이제 나이가 드니 꽃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해 준 적이 있지 싶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본다. 산야에 미만한 것은 옅은 연두색 꽃 더미다. 바야흐로 밤꽃의 세상이다. 살아오면서 유월은 나에게 많은 사연을 안겨주곤 했다. 그만큼 생각도 많아지고 힘이 드는 달이다. 그래도 가는 데마다 꽃들의 미소에 나는 힘을 얻는다.  [위의 글은 2020. 6. 8. 기록임.]    2020.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