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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향기

말의 향기 청솔고개 한해가 또 어둠 속으로 저물어 간다. 해가 바뀐다는 것은 시간과 인간의 편의를 위해 날짜의 개념을 적용해서 덧씌운 분절성을 통한 의미 부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달그믐날과 정월 초하룻날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태는 조금은 별나 보인다. 그래서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마라.’를 나는 ‘가는 세월 붙들지 말고 오는 시간 거절하지 마라.’로 고치고 싶다. 갈수록 친구 사이의 개인적인 인사말을 비롯해서, 방송과 포털에서 과잉 정서로 포장된 언어가 난무한다. 언어가 난무하면 일견 세상이 참 활발하다고 느껴지지만 그만큼 인간은 언..

나의 길 2023.12.31

남겨졌으면 하는 것들 1

청솔고개 이즈음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나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그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득해지기도 한다. 그건 상상조차도 안 된다. 나의 사후, 내 삶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기록과 생전에 사용했던 물품일 것이다. 어떤 시인은 그의 시에서 “두고 갈 게 없구나……”하고 비탄해 했는데, 나는 솔직히 아직은 내게 소중했던 것은 대대손손 고스란히 남겨졌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내 존재가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잊힘과 묻힘’이 되는 것은 그대로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두고 갈 게’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다. 작년 8월에 향년 아흔셋으로 가신 아버지가 남긴 많은 자료와 물품을 떠올려 본다. 갖가지 자격증, 근정훈장을 비롯한 상..

우중 산행, 단상 5

청솔고개 마음이 어지러우면 나도 모르게 산행이다. 가는 길 양옆에는 오래된 절터에 풀이 자부룩하다. 그 풀밭의 풍요로움을 생각하니 문득 어린 시절 소먹이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집 우공(牛公) ‘아리랑스리랑’과 그 어린 것을 여기에 풀어 놓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다. 아침 8시도 안 돼 내리는 햇살의 두께를 보니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멀리 숲의 머리에는 엷은 안개가 서리고 있다. 황화코스모스가 막 피어나기 시작한 남천 물줄기 여울목 위로도 가을 안개가 피어나고 있다. 마치 늦봄 먼 들녘에서 보릿단 태우는 연기처럼 보인다. 그 보릿단 태우는 냄새는 마침내 한여름 대지가 앓고 있는 열병(熱病)의 종언을 시사한다. 또한 내 어린 날 홍역에서 해열(解熱)될 때, 내 이마에서 느..

우중 산행, 단상 4

우중 산행, 단상 4 청솔고개 10시 좀 지나니 세차게 내리던 비가 약한 이슬비로 바뀌었다. 나는 황급히 산행 준비해서 옥룡암 입구로 향했다. 들머리에는 ‘기상악화로 출입금지’라는 경고문구와 더불어 차단해 놓았다. 오늘은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옥포저수지 옆길로 해서 올라갔다. 여기도 두 군데 출입금지라 안내해 놓았지만 오늘은 좀 지나가기로 했다. 첫 번째 여울을 만났다. 계곡 물 건너려고 해보니 물살이 제법 세다. 떠내려 갈 걱정은 조금도 없겠지만 무리하게 건너다가는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등산화가 많이 젖을 것 같기도 하다. 혹은 다칠 수도 있다 싶어서 건너기가 좀 꺼려진다. 다시 능선 오솔길로 되돌아가서 두 번째 물 ..

우중 산행, 단상 3

청솔고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중산행이다. ‘비가 와도 떠납니다.’하는 지난 날 답사 모임의 캐치프레이즈가 생각난다. 천년의 바람 소리 대신 빗소리가 스며드는 대숲을 출발한다. 바다, 못, 강, 계곡의 깊은 물에 몸을 담가 본 적이 20년은 더 된 듯하다. 아내의 햇빛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신혼 초 캠핑이나 해수욕 두어 번 갔었고 나중에 아이들 꼬맹일 때 물놀이 가끔 가 본 기억밖에 없다. 이 비 맞고 떠나면 그 길은 바로 나의 물놀이 터이다. 천연의 물맞이다. 자연에 가장 잘 몰입할 수 있는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오솔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레 빛을 차단하고 수중 코스로 잠수하는 것이다. 마치 계곡이나 바다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든다. 누가 나의 이 짓을 보면 참 엉뚱하다거나 술 취해서 하는 ..

우중 산행, 단상 2

청솔고개 우중(雨中)인데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사람들을 몇 만났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인가. 심경인가. 들머리에서 산행 마치고 내려오는 노부부, 쉼터에 머물 때 힘차게 능선 오솔길로 치달아 오르는 노란조끼 중년 남자 둘, 40대 커플도 내려온다. 오늘은 큰맘 내서 일천바위 바로 아래 제1군 바위까지 가 보았다. 동녘의 들을 오랜만에 내려다본다. 벼가 자라고 있는 논에도 멀리서 비가 묻어오고 있다. 바위 옆으로 50대 남자가 가벼운 차림으로 열심히 오르고 있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은데 이 50대는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궁금하다. 제1 쉼터다. 바람에 휩쓸리는 빗줄기가 안개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아니, 그것은 만물의 정령(精靈)이다. 그 기운이 하늘로 뻗친다. 휘휘 춤을 추며 천상..

우중 산행, 단상 1

청솔고개 오솔길을 올라간다. 태풍전야의 바람에 풋밤송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구르고 있다. 어언 가을 소식인가. 능선을 따라 오르막에 올라도 덥지 않다. 서늘하고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헤세가 사랑한 가을인가. 첫 쉼터에 이르렀다. 계곡 너머 비탈에는 송림이 짙어져서 오히려 검은색이다. 자산(玆山)이다. 나는 이 한 시간이 참 행복하다. 나우 앤 히어, 이 순간, 이 곳이 행복하면 행복한 거다. 마음 평화다. 이 순간이 이어져서 평생을 이룬다. 나의 행복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여기 쉼터, 지금 흩뿌리는 빗소리가 정겹다. 귀한 시간, 소중한 장소다. 두 번째 쉼터에 앉는다. 나의 저림도, 떨림도, 뒤뚱거림도, 더덩덩거림도 모두 내것, 끌어안고 나와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다육이 양육법 5

청솔고개 삼라만상 존재의 으뜸 원리는 봉별(逢別)의 무상(無常)함이라 할진대, 무릇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헤어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이를 얻어서 영유아기를 거치면서 나날이 달라지는 모습에서 어떤 기적을 발견한다. 그 발달, 성장해 가는 모습에서 부모는 평생의 대견해함, 평생의 기쁨, 평생의 즐거움을 다 누리고 맛본다. 첫 눈 맞춤, 첫 옹알이, 첫 배밀이, 첫 일어섬, 첫걸음 떼기는 키우는 이에 대한 무상(無上)의 보상(報償)이다. 그 아이에게 쏟은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은 그 순간순간 해결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을 위한답시고 탐욕스럽게도 그 아이의 전 생애를 통해 뭔가를 끊임없이 얻으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이는 마치 내가 자식에게 그..

다육이 양육법 4

청솔고개 내가 이 상황이 하도 답답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여름철 기온이 지나치게 높거나, 통풍이 안 되거나, 지나치게 습하면 그런 물러짐 병증이 생긴다고 설명해 놓았다. 이에 대비한다고 했는데도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비바람이 심하지 않으면 항상 온 창문을 다 열어놓았고 에어컨을 가동해서 습도조절도 제대로 해주곤 했었다. 그 동안 이들과는 서로 말은 못 나누지만 뭔가 교감(交感)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틈만 나면 농부가 조석으로 채전 밭이나 문전옥답을 둘러보듯이 하루에도 서너 번은 족히 둘러보곤 했던 것이다. 논밭의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은 진실이다. 이들은 우리 집에 들어오는 대로 그런대로 잘 커주면서 내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아낌없이 주었다. 생명 현상에 대..

다육이 양육법 3

청솔고개 거실에서 키우고 있는 다육이 몇 개가 달포 전부터 힘이 없어 보이고 밑동부터 잎이 시나브로 지고 있었다. 마치 다 핀 동백꽃잎이 떨어져 땅바닥에 쌓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증상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며칠 전 서울 간다고 집을 나흘 비운 뒤에 와보니 그 증세가 더욱 악화됐다. 화분 한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다 그런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 동안 태풍으로 문을 너무 처닫아 놓아서 습도와 온도가 지나치게 높아져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내가 물을 준 뒤 혹 너무 많이 줬나 싶어서 좀 마르라고 이 폭염에 창가 달궈진 곳으로 무작정 내몰지는 않았나 하는 죄책감도 든다. 작년 여름까지 2,3년 동안은 그보다 더 좋지 않은 생육환경이었지만 잘 버텨줬는데 이 상황이 정말 답답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