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나의 열 살 전후사(前後史)6, 한여름 하루나기/ 노란 열매를 대나무 딱총 알로 삼아서 놀았던 그 포구나무도 명을 다해 자취는 간 곳이 없다.

청솔고개 2020. 7. 6. 05:32

나의 열 살 전후사(前後史)6, 한여름 하루나기

 

 

                                                                                                    청솔고개

   한여름이다. 이 때만 되면 항상 내가 할 일이 정해져 있다.

   가장 큰 일은 근처 ⁰소두방 산 ¹치지거리까지 소 먹이러 가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선 아침부터 할 일이 순서대로 정해져 있다.

   아침 죽을 먹은 소 두 세 마리는 잠깐 사랑채 뒤 대나무 숲 울타리 ²마닥에 매어져 있다가 무지당 솔숲으로 몰고 간다. 거기서 오전을 보낸다. 집은 덮고 쇠파리도 ³까부던지도 극성이기 때문에 들 가운데 바람이 잘 통하는 언덕 솔숲으로 오전 피서를 떠나는 셈이다. 온 마을 소가 모두 모여 있다. 말하자면 소의 놀이방인 셈이다. 거기서는 소가 똥을 누어도, 오줌을 싸도 공간이 넓어서 모두들에게 덜 힘 드는 것이다.

   풋고추와 마른 ⁴메래치 ⁵꼬장에 찍어 찬물에 꽁보리밥 말아서 얼른 퍼먹고 솔고개 낮 휴식을 즐기러 간다. 솔고개는 마을 입구 북쪽 입구 언덕배기에 있는 동네 쉼터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리를 들고 와서 베적삼을 풀어헤치고 낮잠을 달게 즐기는 마을 쉼터다. 깜장고무신에 베잠방이,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적삼을 풀어헤치고 모두들 낮잠에 코를 드르릉 곤다. 참 기름진 단잠이다. 나도 한 자리 끼인다. 잠은 잘 오지 않지만 어쩐지 이 분위기에 어울려야 할 것 같았다. 또 분위기가 좋은 느낌이 든다.

   낮잠 살풋 자고 나서 깨면 이윽고 소 먹이러 갈 시간이다. 그 무지당을 향한다. 벌써 먼저 온 동무들이 소⁴이까리를 풀고 있다. 우리들은 소이까리를 거머쥐고 ⁵미영 밭 샛길을 조심해서 지나간다. 소 ⁶코꾼지를 느슨하게 해주면 소가 가장 좋아하는 미영 잎과 다래를 순식간에 날름 훔쳐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다래는 미영 열매인데 가을이 되면 마르고 단단해서 ⁷소캐가 되는 것이다. 이 다래를 사람이 먹으면 ⁸문디이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서 먹고 싶어도 꾹 참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산 속 다래열매와 미영의 열매 모양이 비슷하게 생겼다. 그 소캐의 소중함을 지키려는 어른들이 지어낸 말이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그런 금기를 만든 어른들의 현명함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제집 소가 이렇게 방목을 저지르게 되면 물어내야 하기 때문에 무척 곤혹스러워들 한다.

   저녁을 먹고 또 솔고개로 사람들은 모인다. ⁹모깨불을 피워놓고 희미한 등잔불 밑에 ₀느른국이나 ₁수지비를 먹고 난 저녁이면 소르르 식곤증으로 초저녁잠이 들려고 하는데 뒷길에는 벌써 마을 머슴애들과 장정들이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 무리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발바닥으로 길바닥을 꿀리면서 유행가 한가락을 신명나게 풀어낸다. ‘해운대 엘레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유정천리…….’ 등은 단골 레퍼토리다. 그러면 나도 집에 그냥 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솔고개로 간다. 벌써 끼일 틈조차 없이 빽빽하게 마을 사람들이 드러누워서 혹은 앉아서 긴 ₂대꼬빠리나 ₃빨뿌리에 담뱃불을 뻐끔거리거나 신문지를 잘라서 만 ₄마꼬 담뱃잎에서 연기를 푸푸 뿜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것이다. 집안살림이야기랑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보다 먼나라 이야기, 항상 대단했던 소싯적 영웅담, 귀신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귀를 쫑긋하게 하는 단골메뉴였다. 더러는 ₅토째비와 밤새 힘자랑한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 때부터 풍문처럼 들여왔던 월남전 전세(戰勢)와 땅불 이야기는 단골로 듣던 이야기인데 항상 내게는 미지의 막연한 공포감, 무서움을 안겨주었었다. 땅불은 요즘 지진이나 화산을 말하는 것 같았다. 누구는 ₆찌끔이를 보았는데 승천 못해서 용이 되지 못했으니 앞으로 더욱 가물 거라는 이야기를 꼭 직접 본 듯이 말한다.

   리대통령과 이강석, 이기붕과 자유당 정권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나라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나거나 변고가 생겼다는 소문이 들리면 우리 집 같이 라디오가 있는 집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₇덕시기에서 앉아서 두렵고 긴장된 표정들을 하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그 때는 진공관식 라디오였는데 그걸 가진 집이 마을에 몇 집 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삼태성도 기울고 전기불이 훤하던 성내 쪽 하늘이 희뿌예지면 밤이슬이 촉촉이 내리고 한 두 사람씩 자리를 챙겨서 잠자러 집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녘 하늘에 휙 하면서 불꼬리를 내리는 유성은 한을 품고 죽은 어느 망자의 넋인 양 숙연해지고 두려운 기운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러다가 시간은 벌써 새벽을 향한다. 이런 밤이면 집에 가서 잠자리에 누워도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더욱 무서워진다. 흥건히 땀 흘리며 악몽에도 시달리거나 가위눌리기 일쑤다. 모기장 속의 큰방의 바닥은 ₈저녁답부터 초저녁까지 저녁밥 지어 먹은 불기운으로 한여름 밤이지만 찜질방이다. ₉불뜸질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혼곤히 잠도 잘도 잔다.

   이 시간 즈음해서 가끔 가는 데가 있다. 들 가운데 있는 봇도랑이다.

   한낮이 너무 더워서 온몸에 땀때기⁰가 나면 그 땀때기 죽이러 거기에 가는 것이다. 거기는 얼음 같은 찬 샘물이 콸콸 솟아나서 도랑을 이루고 있다. 이슬이 촉촉이 젖은 들길을 걸어가면 개똥벌기¹들이 날아오르고 개구리소리도 요란하다. 들 마을에 개 짖는 소리가 멈출 듯하면 봇도랑이 나타난다. 발가벗고 물개똥벌기¹에 들어간다. 얼음물이다. 냉기로 곧바로 얼어붙어 죽을 것만 같다. 이빨이 부딪쳐서 소리가 난다. 이래야 땀때기가 가라앉는 줄 알았다.

   이제 그 솔고개 벼락 맞은 소나무도 흙으로 돌아가고, 노란 열매를 대나무 딱총 알로 삼아서 놀았던 그 포구나무²도 명을 다해 자취는 간 곳이 없다. 그 대신 우리 손목만 했던 느티나무 몇 그루가 거목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2010. 7. 4.

 

 

[주(注)]

⁰소두방 : ‘소댕’의 토박이 말

¹치지거리 : 다른 토박이 말로 ‘치거리’라고도 하며 ‘기슭’ 혹은 ‘마루터기’의 토박이 말

²마닥 : ‘외양간’의 토박이 말

³까부던지 : ‘진드기’의 토박이 말

⁴메래치 : ‘멸치’의 토박이 말

⁵꼬장 : ‘고추장’의 토박이 말

⁴이까리 : ‘고삐’의 토박이 말

⁵미영 : ‘무명’의 토박이 말

⁶코꾼지 : ‘코꾼지’의 토박이 말

⁷소캐 : ‘솜’의 토박이 말

⁸문디이 : ‘문둥이’의 토박이 말

⁹모깨불 : ‘모깃불’의 토박이 말

₀느른국 : ‘손칼국수’의 토박이 말

₁수지비 : ‘수제비’의 토박이 말

₂대꼬빠리 : ‘대통’ ‘곰방대’ ‘담뱃대’, ‘장죽’의 토박이 말

₃빨뿌리 : ‘파이프’, ‘짧은 담뱃대’의 토박이 말

₄마꼬 : ‘권련’의 토박이 말

₅토째비 : ‘도깨비’의 토박이 말

₆찌끔이 : ‘지킴’의 토박이 말

₇덕시기 : ‘멍석’의 토박이 말

₈저녁답 : ‘저녁때’의 토박이 말

₉불뜸질 : ‘모래찜질’의 토박이 말

땀때기⁰ : ‘땀띠’의 토박이 말

개똥벌기¹ : ‘반딧불이’의 토박이 말

포구나무² : ‘팽나무’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