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
청솔고개
오늘은 매달 11일 시내 사는 ‘국민 학교’ 동기들과 만나서 식사하는 날이다. 우리가 그 학교 11회 졸업생이니 기억하기 좋도록 11일로 하자고 내가 제안해서 벌써 15년 쯤 이어오고 있다. 처음엔 12명 정도 됐는데 이제 이런 저런 사정으로 다 나가고 5명 남짓 남아서 매달 밥이나 한 끼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저녁 6시 30분까지 근처 공원 시계탑에서 만나서 외곽지의 산 밑의 예약된 식당에 택시타고 갔다. 한적한 게 산골 분위기 나는 게 좋다.
오늘은 오리 누룽지탕이라는 특별한 메뉴로 식사를 했다. 이 모임에서는 살아가는 또 다른 서로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빠져들면 나도 모르게 스스로 마음의 치유가 되는 좋은 경험을 늘 한다. 이야기에 취하면 소주 한 병으로 네 명이 나눠마셔도 나 혼자서 한 병 다 마신 듯, 기분이 고조된다. 그래서 더 좋다.
난 이 모임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은 나로 봐서는 그지없이 소중한 것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국민 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고향 마을 근무 학교에서 좀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로 전격적으로 전근이 되었다. 아마 정변의 주체는 이즈음의 분위기 쇄신이라는 정치적 명분이 전 방위적으로 필요해서 그랬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고향에서 어른들 모시고 안정적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솔가해서 새 부임지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1년 만에 또 다른 학교로 이동이 되었다. 이로써 거기서 나의 4학년은 4월 달에 아버지 따라 전학했으니 1년도 다 못 채운 셈이다. 5학년 되자마자 다시 전학하게 된 것이었다.
전에 살던 사택은 지붕은 골기와로 덮여 있고 좀 높아 보이는 죽담이 있는 제법 품격이 있는 집이었는데 이사한 데 사택은 그냥 소박한 초가 삼 칸이었다.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 그 부엌과 큰방마저 먼저 부임해서, 젊은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는 교사 식구의 차지였다. 우리는 당연히 나지막한 담이 쳐져 있는 단칸 갓방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 아홉 살 어린 둘째 남동생이 함께 살았다. 부엌은 따로 없어 아궁이가 달려 있는 집의 남쪽을 짚으로 엮어서 만들어 놓았다. 겨우 비나 피할 정도였다. 두터운 짚으로 둘러싼 된 움막 부엌이니 오죽했겠나. 하루 종일 햇빛 한 점 못 보아서 방안이 온통 어두컴컴한 것은 고사하고 움막 짚에서 생기는 온갖 벌레며 먼지가 기승을 부렸다. 여섯 살 어린 첫째 남동생은 고향 큰집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학한 다음해, 내가 6학년이 되어서 잊지 못할 두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하나는 아버지가 6학년 담임을 하는 바람에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었던 당시 시골학교라 아버지가 나의 담임교사가 된 것이었다. 어린 내 마음에도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건 그럭저럭 버티어 나갔다. 큰 아들 반의 담임교사 된 아버지의 입장은 또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부자간의 일거수일투족이 반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건 물론이다. 긍정적 영향, 불편함이 공존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나의 셋째 동생이 그 사택 단칸 갓방에서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의 출산 임박 조짐 정도는 아버지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출근 안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버지가 걱정은 되셨는지 나에게 집에 가보고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하신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내가 집에 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머니가 혼자서 우리 오남매 중 넷째이며 나와 띠동갑이었던 셋째 동생을 순산하신 것이다. 아직은 서른 넷의 젊은 엄마이셨다. 그 때는 내가 급히 아버지에게 연락하려던 순간인 걸로 기억된다. 어린 내 마음에도 이런 당혹스럽고 어쩌면 참담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스스로 아기를 받고 불에 달군 가위로 탯줄을 자른 걸로 내가 어렴풋이 기억한다. 물론 그 후도 어머니는 산후 구완을 전적으로 당신 손과 다소간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무리했음은 물론이다. 그 후 어머니가 노경에 허리고 어디고 간에 급격히 쇠약해지신 게 이런 일 때문에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다들 살아오신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는 아득히 먼 다른 나라가 배경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2년 동안 거기서 나는 유년기말을 보냈었다. 그런 와중의 친구들이니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내 태어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그 곳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거기의 모든 기억이 동화책 한 장에 그림처럼 새겨져 있다.
사택 앞 너른 학교 밭에 철따라 배추며 무를 심었는데 그 때 배추벌레를 처음 보았다. 틈만 나면 배추벌레 잡는다고 밭고랑 따라 오갔던 기억, 배추흰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는 밭을 지나면 밭의 가장자리는 탱자나무숲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봄이면 해끔하게 피어나는 탱자 꽃, 가을이면 주황으로 익어가는 새콤한 탱자 알……. 특히 겨울과 초봄까지는 처음으로 내가 손수 만들어서 날려보았던 연날리기, 시내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담임교사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다른 학생들 함께 촛불을 켜 놓고 공부에 몰두했던 기억, 학교 안 사택에 식구들과 함께 기거하신 교장선생님은 낚시를 즐겼는데, 잡은 고기를 사모님이 붕어찜, 잉어찜으로 장만해서 쟁반에 담아서 나보다 두 살 어린 그 댁의 딸내미가 달랑달랑 들고 오곤 했었는데, 그 예쁘장한 아이의 얼굴이 아직 남아 있다. 내가 커가면서 가끔씩 그 풍경이 아른아른 내 눈에 밟혔었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이제는 묽고 부드럽게 그려진 수묵화가 된다.
내 안의 수묵화 속에 지금 옆에 있는 친구들이 오롯이 앉아 있다.
2020.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