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 살 전후사(前後史)4, 큰할배와 우리 집 소 ‘아리랑고개’
청솔고개
먼저 큰할배[증조부]와의 추억이다. 큰할배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 모든 게 눈에 선하다. 내가 너 댓 살에서 아홉 살까지 몇 년 동안이 큰할배와의 동행 기간이었다. 큰할배는 오전엔 주로 내 동생을 보아주신다. 둘째 증손자인 두 살짜리 내 동생을 걸리거나 업고 마을 당수나무로 데려가서 같이 놀거나 재우신다. 얼렁설렁 흔들어 주기도 하고 슬슬 부채질로 파리도 쫓으면서 아이를 맡아 돌보시는 기술이 아주 독보적이다. 이럴 땐 맏손부인 우리 어머니가 제일 득을 본다. 그래서 어머니는 편하게 할아버님께 아이를 맡기신다.
이제 점심 먹고 오후다. 큰할배와 동행할 때가 더러 있었다. 우리는 주로 소를 몰고 산으로 가지 않고 들로 나다닌다. 그래서 나는 큰할배하고 동행하는 게 싫을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산으로 소 먹이러 가면 동무들과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큰할배하고는 그냥 뙤약볕에서 소를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 번도 그게 싫다고 내색은 못했다. 오후 내내 수리조합 도랑가에서 소이까리를 잡고서 풀을 뜯어 먹이고 당신께서도 짬짬이 소풀을 뜯는다. 내가 아직 어리니 나를 그냥 옆에 있게 하거나 당신이 아주 바쁘시면 내게 소이까리를 잠깐 맡기신다. 그리고는 산의 풀보다 더 보드랍고 웃자라서 키가 큰, 푸짐한 들판의 소풀을 한 망태에기 꼭꼭 채워 넣으신다. 우리는 그 당시 유행했던 박재란 가수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콧노래로 함께 흥얼거려도 보았다. 어찌하여 그 노래를 우리 큰할배께서 알고 계신지, 지금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뭘 알고는 따라 불렀는지 자세한 상황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소풀 뜯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⁰약국대 같은 독초를 섞어 넣지 않는 일이다. 소죽 쑬 때, 얼마나 넣으면 소에게 해가 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이건 아주 금기 사항이다. 이 약국대가 독하다는 사실은 이걸 찍어서 독즙을 내어 고기를 잡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수리조합 도랑이나 실개천을 아래 위를 막고 물을 어느 정도 퍼내고 난 뒤, 이 독초 즙을 풀어내면 고기가 금방 힘을 잃고 ¹히빌레히빌레하면서 물위로 떠오른다. 그냥 주어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고기들을 새 물에 담가 놓으면 바로 기운 차리는 게 무척 신기했었다. 그 긴 여름날 오후 내내 진청록의 들녘은 한낮의 열기에 더욱 익어가고 저녁놀이 벌겋게 번져올 때까지 우리는 들길이나 도랑둑을 섭렵한다. 6월에는 그 화려함이 마치 영롱한 무지개 같은, 그 이름처럼 고운 자운영(紫雲英), 7월에는 그 소박한 미소가 촌색시 같은 ²미꽃, 8월에는 독사가 나옴직한 풀이 우거진 데 잘 자란다는 다 큰 ³독새풀과 함께 들길을 누비곤 했었다. 증조부와 맏증손, 우리의 여름 동행은 이렇게 이어졌었다. 그 때 큰할배의 탐스러운 긴 수염 끝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아직도 뚝뚝 듣는 듯하였다.
다음은 우리 집 소 ‘아리랑고개’이야기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그냥 우리 집 늙다리 암소와 함께 보낸 한 세월이었다. 뿔이 옆으로 뒤틀린 듯하고 한 없이 선한 눈매를 한 우리 소는 항상 눈가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여섯 살 아래인 내 동생도 이 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소의 표정, 특히 깊고 그윽한 눈은 알 수 없는 고뇌를 지닌 듯도 하였다. 우리 소는 도대체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비록 말 못하는 축생(畜生)이지만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동네 사람들의 남다른 주목을 받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선하고 우직(愚直)한 우리 집 소를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우리 소를 놀린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좀 상했지만 언제부턴가 ‘아리랑고개’는 우리 마을의 명물(名物)이 되어버렸다. 뒤틀린 뿔이 마치 그 당시 ‘아리랑’ 담배 문양(紋樣)에서 상모(象毛)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소는 내 유년 시절 나의 동반자였다. 들로는 큰할배와, 산으로는 동무들과 같이 누비다시피 했으니까. 우리 소 잔등에 올라타고는 떨어질까 봐 윗몸을 앞으로 엎드리고 고개를 숙여서 그 아리랑고개 뿔을 잡고 함께 걷고 함께 뛰고 한 적이 생생하다. 그 ‘아리랑고개’가 초등 5학년 초엔가 그만 팔려가는 사건이 발발했다. ‘아리랑고개’에는 암송아지가 하나 딸려 있었는데 어미 소가 팔려가는 바람에 이 우공 모녀의 애처로운 울음이 며칠 동안 내 귀에 쟁쟁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별의 슬픔은 더 오래갔었다.
지금도 그 ‘아리랑고개’의 뿔 모양과 아리랑 담뱃갑 문양이 오랜 기억 속에서 묘하게 오버랩 된다. 어언 육십 년 전 일이다. 그래도 ‘아리랑고개’를 몰고 들로 산으로 다니던 시절이 어제인 듯하다. 2020. 7. 2.
[주(注)]
⁰약국대 : ‘고마리(여뀟과에 속한 덩굴성 한해살이 풀)’의 토박이 말
¹히빌레히빌레하면서 : ‘힘이 빠져 잇달아 흐느적거리면서’의 토박이 말
²미꽃 : ‘메꽃’의 토박이 말
³독새풀 : ‘뚝새풀’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