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명상(瞑想) 터
청솔고개
언제부터인가 나는 길가다가 나의 명상 터를 찾아 나선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곧장 그 명상 터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갈구한 시기는 예순이 지나서부터였다.
인체생리학적으로 볼 때 이때부터는 몸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해서 그 정도가 가속화 된다고 한다. 몸의 생리적 균형이 맞지 않으니 심리적 균형도 자연스럽게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내가 지정한 명상 터를 가노라면 내 마음은 벌써 평화와 평정의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명상이 무엇인가.
나의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정신의 편력에서 명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과 마찬가지이고, 칠흑 같은 한밤 폭풍우 항해 중 등대를 발견한 것과 비견할 만하다.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일진대, 명상은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이끌어갈 수 있는 멋진 장치요, 마음의 시스템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평정 상태로 마음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만 해도 벌써 마음은 평온해지는 것이다.
명상은 한마디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10여 년 전에는 멋진 명상 터를 하나 찾아냈다.
내가 근무하던 곳에서 자전거로 20분 정도 거리다. 여울물이 졸졸 흘러가는 강변이었다.
강둑에는 가로수가 가지런히 자라고 있고 거기서 조금 내려가면 무성한 갈대가 도로의 소음을 막아주는 멋진 곳이었다. 강가 바로 옆에는 풍성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는 수양버들이 제 얼굴을 여울물에 비추고 있는 곳이다.
나의 명상 방식은 이렇다.
나는 명상 터에 도착하면 바로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허리는 곧추세우고 눈은 반쯤 감는다. 편안한 자세로 심호흡을 한다. 한 번 숨을 깊게 내쉴 때마다 내 주변에 떠오르는 가장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더 크게 확대해 본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 이마, 눈, 코, 입, 뺨, 턱, 목까지……. 천천히. 이렇게 자꾸 반복을 한다. 마지막에는 나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나의 머리카락, 이마, 눈, 코, 입, 뺨, 턱, 목 등. 내가 떠올리는 사람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교차시켜 본다. 그러면 이상하게 두 존재는 심리적 교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사람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그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바로 마음과 마음의 대화인 것이다. 나의 명상 방식은 잠겨있을 때는 결코 생각을 거두려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간간히 바람소리가 귀를 스친다. 갈댓잎이 서로 서걱대는 소리나 바람과 더불어 속살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날아가다 흘리는 새소리, 여울물 흘러가는 소리는 두 존재의 교감을 더욱 촉진한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잘 모를 때도 있다.
철따라 꽃잎이 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낙엽이 지는 소리가 들리면 좀 있다가 가랑잎이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요즘 같으면 강변에서 비 뿌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명상이 된다. 천상에서 천만의 빗살이 천만의 흔적을 내며 꽂힌다. 비가 오려고 하면 청개구리부터 울어댄다. 근처 축 늘어져 지친 호박잎에도 빗살이 흥건히 고인다. 호박잎에 김이 솟는다. 우산을 들고 앉아 있으면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우두둑 우두둑, 마치 내 심장을 치는 북소리 같다. 이때는 명상이 촉진되는 느낌이 든다.
더러는 새벽길을 걷다가 잠시 쉬면서 명상에 몰입할 때도 있다. 강가에서 산록까지 퍼져있던 새벽안개가 스멀스멀 기어오를 때는 내 마음은 벌써 우주의 중심이 된 듯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눈이 올 때 강변에서의 명상은 다분히 구도(求道)적으로 보인다. 설산에서 고행하던 불타의 경지를 감히 엿보려고도 해 본다. 예수의 광야에서의 외침도 결국은 긴 명상에서의 깨달음의 소리인 것이다. 한낮의 타는 목마름과 한밤을 지새우면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다다른 정신의 세계. 그분들은 일찍이 육신의 고통이 정신의 정화(淨化)를 가져온다는 원리를 터득하고 그렇게 정진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강변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이는 마치 자신의 어려움을 메모지나 낙서 장, 아니면 폰에 기록함으로써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명상은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언어로서의 분석 작업에 해당된다. 나는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예닐곱 살부터 이런 작업에 매달려왔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상자에 차고 넘치는 나의 ‘생애 기움’ 자료가 보존돼 있다. 또 나의 노트북에는 내가 나를 보고 분석한많은 양의 자료가 저장되어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면서 기록하고 있는 나의 '생애기움' 이 바로 나의 명상이다.
바로 이곳이 내가 가장 아끼는 명상 터, 나의 책상머리에서 나를 위한 평생토록 진행하는 ⁰글쓰기 치료는 나만의 명상이다. 나는 매일 혹은 순간순간 나의 마음을 글쓰기로 분석함으로써 명상에 몰입하는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책상머리 창 너머에도 이제 도심의 불빛이 희미해져간다.
나의 정신은 더욱 성성(惺惺)해진다. 2020. 7. 17.
[주(注)]
⁰글쓰기 치료 : "글쓰기치료는 질병에 대한 물리적 증상 감소뿐만 아니라, 정서적 갈등 유화, 자기인식 양성, 행동조절, 문제해결, 불안감소, 현실지향 원조, 자긍심 증대 등의 심리적 효능도 가지고 있다. 글쓰기치료는 자신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도록 해 주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는 치료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저항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수치심을 다루는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글쓰기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발견하게 하거나 억압된 것을 회복시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중략)
글쓰기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글쓰기를 통한 의식의 확장 및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는 예전에는 표현하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했던 것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극도로 구조화된 과제들은 역설적이게도 글 쓰는 사람의 심리적 방어벽을 무너뜨리고 놀라운 자기표현을 이끌어 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글쓰기치료를 두고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나 길이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글쓰기치료 [writing therapy, -治療]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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