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그 여름의 여행길/중국 서안, 장가계, 상해 기행보고서 3

청솔고개 2020. 8. 17. 10:34

그 여름의 여행길/중국 서안, 장가계, 상해 기행보고서 3

                                                                                                         청솔고개

   2004. 7. 30. 금. [둘째 날 후편]

   점심은 교자상이라는 중국현지식 특미로 했다. 360가지의 요리 중 오늘 맛본 것은 15가지 정도, 작고 앙증맞은 갖가지 만두 요리가 기억에 남는다.

   점심식사 후 한국인이 경영하는 건강 식품점에 들러서 설명을 들었다. 북의 김일성장수연구소에서 개발한 식품이라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자작나무에서 생기는 차가버섯덩어리는 좀 신비한 효능이 있을법해서 만져보았다.

   이어서 오늘 여행의 중심인 진시황 병마용총을 찾았다. 아직 포장도 덜되어서 파헤쳐져 먼지가 풀풀 나는 주차장 사이로 중국 '인민(人民)'들의 고단한 행상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저씨! 천원, 싸다.” 뭐든지 천원단위로 판다. 한 개 천원이 안 되면 두 개, 4개, 심지어 열 개가 넘을 때도 있다. 좀 짓궂은 여행객은 장난으로 재미삼아 한 개 천 원짜리를 열 개 천 원짜리로 흥정해 놓고 결국은 사지도 않는 일도 더러 있었는데 좀 심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이런 행동은 자칫하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가학하는 심리 만족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나는 속으로 삼가주었으면 했다. 3,40년 전 우리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거래는 물론 흥정하는 재미도 있지만 실컷 흥정해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외면한다면 파는 사람의 속은 어떨까? 아이들은 장난으로 연못에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목숨의 위태함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나.

   진시황릉 병마용총에는 많은 인파가 북적대었다. 서양인들도 부쩍 많이 보였다. 다른 데선 별로 찾아볼 수 없었는데 키 크고 굵고 뚱뚱한 서양 남녀여행객들이 거의 벗은 차림으로 삼삼오오 지나간다. 입구에서 한 참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얼마 전부터 걱정되었던 내 발바닥 뒤꿈치가 슬슬 말썽을 피울 것 같았다. 병마용총은 3전시실까지 있는데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 시황제의 위용과 독재 권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6,000여개나 되는 도용(陶俑)은 흙을 빚어서 만들었는데 같은 표정, 얼굴이 하나도 없이 개성 있게 표현했다는데 다시 한 번 놀랐다.

   진시황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오제에서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으로 스스로가 삼황오제의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문자의 통일로 동문(同文), 도로의 건설로 치도(馳道),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분서갱유(焚書坑儒), 불로장생의 꿈, 아방궁, 만리장성 등의 업적과 특징으로 기억되는 최초의 중국 통일을 주도한 군주다. 진시황의 출생은 너무나 극적이고 기구하다. 대상(隊商) 인이었던 여불위는 교묘한 정치공작을 펴서 진나라의 서출공자 자초의 후원자가 되는데, 기원전 249년 자초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렇듯 진왕 정(政)은 여불위와 자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초가 어느 날 여불위에 집에 초대되었는데, 여불위의 애첩을 보고 반해서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일을 앞두고 작은 일을 양보하자는 심정으로 자초에게 내어준다. 후에 그녀는 자초 사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6국을 평정, 천하 통일한 시황이다. 물론 그 아이의 생부는 여불위다.

   진시황은 생전의 영화에 연연하여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 살 즉위 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묏자리를 꾸몄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연인원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다.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 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생전에 만 여명이나 되는 궁녀 중에서 황후를 정하지 않았으며, 그가 죽으면서 궁녀 3,000명이 함께 순장되었다. 왕자 20명, 공주 5명, 형제 12명이 동시에 시살(弑殺)되었다. 바로 이어질 이러한 무덤 내부의 모습을 재현한 지하 궁전 관람이 더욱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

   진나라가 쇠약해지자 새로운 영웅 항우와 유방이 등장한다. 동지와 적의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항우와 유방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 공동 전선을 편다. 유방이 항우의 군대가 진의 주력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에 항우보다 먼저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이른 항우는 홍문에서 유방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아방궁을 불태웠으며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유방은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 후 4년 동안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장양, 한신 등의 도움을 받아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바로 이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다. ‘장안(長安)’은 하도 난세가 계속되니까 ‘오랫동안 평안’하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다음은 앞에서도 장황하게 소개했던 진시황릉을 오르는 차례다. 지금 시간 15:15이다. 황릉은 능이라기보다는 야산 같았다. 주변은 온통 석류가 심어진 과수원이다. 장안시의 꽃[市花]이 바로 석류인데 당시 양귀비가 이 꽃을 좋아하여서 여기에 심어져 퍼진 것이라고 했다. 능의 정상에 오르니 주변은 오직 푸른 구릉과 석류과수원뿐, 안내 표지판과 분위기 짐작을 제외하고는 어디라도 진시황 호령의 흔적은 볼 수 없었다. 하늘이 낸 영웅도 세월이 흘러가면 보잘것없는 한 줌의 흙으로만 남는데, 아!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무상(無常)함이 이와 같거늘,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땀을 식힐 겨를도 없이 황황히 내려오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아래 광장에는 아마 당나라 당시의 복식으로 북을 치면서 군사 조련 모습을 재현한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어서 방금 본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을 1/20로 축소하여 모형을 전시한 지하궁전을 찾았다. 입구에 이 황릉을 축조한 기술자가 황릉의 비밀 보전을 위하여 출구가 막혀 그대로 희생, 정확히 말하면 순장(旬葬)된 미라가 보존되어 있어서 음산한 기운이 엄습한다.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닌데 지하 무덤으로 난 3층 계단은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현란한 조명과 화려한 치장은 살아서의 폭군과 영웅이 죽어서도 그대로 대접이 이어지는가 하는 아이러니를 실감한다. 15:50에서 16:20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시황제의 유해가 어두컴컴한 관속에 누워있다. 천장에는 하늘의 은은하고 화려한 해와 달과 별이 떠 있고 , 은하수가 흐르고, 땅에는 수은을 흐르게 하여 만든 양자강, 황하, 바다의 모형 등이 살아 있을 때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죽어서까지도 움켜 쥐고자하는 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도대체 누가 연출한 것인가?

   이제 실크 로드의 관문인 시안의 여정도 어딘가 서역으로 통하는 사막 길에 낙타의 울음과 짙은 황토 빛 노을과 함께 막을 내린다. 여기서 황하는 불과 60㎞정도, 식당가는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이다. 이른바 황토고원(黃土高原), 길 가 군데군데는 붉은 벽돌로 된 집들이 아무렇게나 자란 숲 속에서 눈에 뜨인다. 말라서 바스락거릴 것만 같은 수양버들 너머는 석류 꽃밭이 펼쳐진다. 붉게 물든 짙은 저녁 안개는 황토 먼지와 어우러져 진한 이국정서를 촉발한다. 그래서 도심에는 고층 아파트는 구경할 수 없다. 황토층이 너무 두터워서 이를 걷어내고 집을 지어야하는데 비용이 너무 든다. 아울러 두터운 황토층 때문에 고층을 지을만한 단단한 기초공사를 할 수 없다. 이 넓은 시안에 한국인들이 불과 450명 정도밖에 거주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이곳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멀리 있는 곳이고 그래서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실감난다.

   'ㅇㅇㅇ숯불갈비'라는 한국식 식당에서 삼겹살과 마오타이로 중국에서의 첫날 저녁 식사를 맛본다. 말만 들었던 중국 명주 마오타이 술맛이 너무 좋아서 무턱대고 기념으로 7만원에 3병을 샀다. 그런데 이게 여정 중 그렇게 부담이 되고 말썽을 부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 내 항공을 이용할 때는 액체 종류는 반드시 화물로 부쳐야 하고 이때에는 깨어지는 위험 부담을 생각하여 1인당 2병씩 2,000원의 보험금을 내야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뿐만 아니라 마오타이 특유의 진한 향이 항상 여행 가방 속에서 뿜어져 나와 꼭 병이 깨어지거나 술이 새어나온 것 같아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항상 불안했었다.

   식당 근처에서 간단히 야시장 구경을 하였다. 잣, 깨, 복숭아, 참외 등 풍부하고 값싼 농산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참외는 4개에 우리 돈으로 1,000원, 복숭아는 20개 한 바구니에 1,000원, 여기서는 우리 돈이 달러보다도 더 잘 통한다. 실제로 난전에서 달러로 치르려고 하니까 막무가내로 안 된다는 현지 주민들의 반응이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가격도 아니다. 사실 거리에서 파는 음식이나 과일을 먹으려니 매우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 중에서 이렇게 난전에서 느긋하게 그 나라의 거리 문화를 접하는 것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18:55, 이제 시안을 뒤로하고 함양공항으로 가는 공항 진입로에 들어선다. 장가계(張家界)행 국내선을 타기 위해서다. 이제 광활한 초지(草地)나 옥수수 밭이 펼쳐지고 강물은 장강(長江)의 영향을 받은 듯 황톳물이다. 때로는 수양버들, 플라타너스, 포플러 등 가로수가 방사림(防沙林)역할을 하며 북국의 붉은 먼지를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로수들은 모두 황사를 뒤집어쓰고 메마르고 지쳐 있는가 보다. 여기서도 시안시의 꽃이라고 하는 석류나무 과수원이 띄엄띄엄 보인다. 시의 나무는 오동나무라고 했다.

   기내 음주문제로 인해 술은 반드시 화물로 부쳐야 되는데 이 때 술병이 깨어져서 남에게 피해를 줄 경우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야 한다면서 가이드는 무척 난감해 했다. 잘 이해 안 되는 점은 술병이 든 가방은 표시를 하게 해서 파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답이거늘 공항 직원들이 마구 다루었을 때를 가정해서 깨어지면 그 피해를 생각해서 보험을 들도록 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다. 우선 누가 먼지 피해를 입는가. 가방 주인이 곧 술병 주인인데 그 속에 중요한 서류나 전자기기 등이 젖어서 못쓰게 된다면 본인 것도 항공사에서 손해 배상해 주는지 묻고 싶었다.

급한 마음에 깨 10㎏는 여행용 가방에 넣고 그 속에 있는 옷가지 등은 깨 가방에 넣었다. 술이 엎질러져서 정말 안에 있는 것들을 못 쓰게 한다면 어떡하나? 온갖 것들이 신경 쓰인다. 술과 깨에게 마음속으로 마구 지청구한다.

   함양공항에서 장가계행 20:50발-22:15착, 곧 착륙한다던 한국어 안내 방송이 무색하게 비행기는 몇 번이나 선회한다. 회항하지나 않을지 적이 걱정이 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상의 불빛이 하나둘 밝게 빛나며 기체 엔진의 착륙 시 가쁜 소리를 들으니 비로소 연착륙이 실감난다. 22:10이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뿜는다. 모임의 회장과 같이 그간의 여행 경험담으로 한 시간은 쉽게 흘려보냈다. 막 트랩에서 내리니 후끈하는 여름밤의 열기가 몰아치지만 마침 동산에 떠오르는 공산명월이 말간 얼굴을 내민다. 달빛이 활주로에 교교히 비친다. 어슴푸레 장가계 명산들의 윤곽이 역광으로 검게 드러난다. 내 가슴은 뛴다. 과연 명승의 첫인상답다. 이역의 밤 공항에서 구름 속에서 나타난 달은 항아같이 이쁘고 반갑다.

   22:50, 최ㅇㅇ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아담한 조선족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열풍이 부는 공항 청사를 지나 한참 걸어가서 전용버스에 탔다. 장가계는 면적은 9,500㎢, 150만 인구, 후난 성 서북부 위치, 후난 성이란 중국에서 가장 큰 동정호 남쪽이라는 뜻, 아열대 기후, 연중 강수량 1,400-1,700㎜, 우기가 300일정도, 토가족 원주민 거주 등 기본적인 사항을 일러 준다.

   호텔에 도착한 후 짐을 풀고 야시장 구경을 나갔다. 토가족 원주민들은 이제 산 속에서 나와 시장에서 모두들 장사를 하다가 날이 더우니, 웃통을 벗은 벌거벗은 장정들이 아무렇게나 집 앞 마루에, 수레 위에서 드러누워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한마디로 불안하고 질서가 없어 보였다. 행상 수레위에 차려진 현지 음식은 더운 기운에다가 각종 고기 구울 때 향신료 내음이 땀내와 부조화를 이루며 코를 찌른다. 무더위 냄새가 마치 이국의 열병을 앓는 듯한 비참한 기분이 된다.

   호객한다고 서투른 우리말로 악을 쓰듯 고함친다. 가이드는 그들의 책임 상 좀 어딘가는 과장되게 현지 거리의 보안에 대하여 겁주는 말을 한다고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불안감은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진광풍이 몰아치더니 홀연 번개와 천둥이 천지를 진동케 한다. 난전들은 재빠르게 포장을 치면서 비 올 것에 방비를 한다. 무작정 앞서가던 팀들은 불안한 얼굴로 되돌아온다. 야시장 구경은 폼만 잡다가 그냥 되돌아 모두들 피로에 지친 심신을 푹 쉬게 했다.

                                                                    2020.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