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길 따라’ 제10일(나폴리, 소렌토, 폼페이)
청솔고개
06:00에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07:00에 아침 식사, 07:45에 호텔 ERGIRFE PALACE를 떠났다. 오늘 하루 동안 남이탈리아를 훑어본다. 로마에서 남쪽 방향인 나폴리-소렌토-폼페이로 가는 길, 또한 늦은 가을로 물든 모습. 만추의 정경이 새삼스레 여정(旅情)을 북돋워준다. 다만 대지는 초록빛과 연두색으로 채색된 듯했다. 평야지대와 낮은 구릉 지대는 파스텔화처럼 부드러운 질감이다. 엊저녁 비로 인해 흥건히 젖은 길은 마치 이른 봄비의 흔적처럼 보드랍고 평화롭다. 지중해성 기후에 적합한 채소밭과 초지 등이 비옥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목장 초지는 양을 치기 위한 것이다. 양 지키는 셰퍼드가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가이드의 시시콜콜한 안내가 그리 지겹지는 않다. 하늘은 간간히 늦가을비를 뿌려대지만 기온은 그렇게 낮지 않다. 이게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09:00 경에는 다행히 먹장구름 사이로 태양이 비친다. ‘오! 솔 레 미오’인가. 가는 길 연도는 거의 대부분 농지이고 드물게 창고와 공장이 맑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폴리 도착을 30분 앞둔 지점에 4월초와 같은 새파란 풀이 돋아있고 이름 모를 노란 꽃이 얼굴을 내민다. 흡사 클로버 같은 앙증맞은 그 꽃은 또 무엇인지! 길가 밭에는 오렌지가 탐스럽게 달려있다. 지중해변에 올리브가 많다던데 그 많은 올리브나무는 어디에……. 이탈리아 전역에는 올리브나무가 유명한데 햇빛만 맞으면 은빛이 난다고. 소나무 가로수는 독특하게 가지와 잎들이 다듬어져 마치 초등학생들이 상고머리 헤어스타일 같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치이다. 오늘 새벽, 호텔 객실에서 창을 통해 밖으로 보았을 때 모습도 그대로다. 왜 자연스럽게 자라는 대로 그대로 두지 않는가. 초등학생이나 군인들의 머리형처럼 뭉툭뭉툭 자른 모습이 좀 낯설어 보였다.
아래 [ ]안은 괴테의 기록이다.
[2월 27일, 나폴리 흔히 말하듯이 유령을 본 사람은 다시는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아버지는 계속해서 나폴리를 꿈꾸었기 때문에 결코 불행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3월 20일, 나폴리 그렇게 무시무시한 대조를 이루는 자연 앞에서 나의 감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광경에다 아름다움, 그리고 아름다운 광경에다 무시무시함, 이 상반되는 요소가 서로를 지양하며 아무래도 좋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3월 26일, 나폴리 이번 여행길에서는 분명히 여행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지만 인생을 사는 법까지 배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인생을 이해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기질과 성향 면에서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어서 과연 내가 그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을까 의문이다.
5월 17일, 나폴리 당신도 말했다시피 나는 사고방식에서 대단히 현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세상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인간들이 모여서 지혜롭고 현명하며 행복한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더욱 적게 갖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세상이 찾아올 가능성은 1백만 분의 1이나 될까 말까 할 정도일 겁니다. 호머가 묘사하는 것은 실제로 현존하는 존재임에 반해, 우리는 보통 그것의 효과만을 묘사할 뿐이며, 호머가 두려운 것을 서술한다면 우리는 두렵게 서술하고, 호머가 쾌적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쾌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과장되고 기교적이며 지나친 겉치레와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효과만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면 그러한 효과를 충분히 느끼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1:20, 나폴리 언덕에 도착하였다. 약간 흐려진 날씨다. 여기서는 화창함, 현란함보다는 그 아득한 고색 창연(古色蒼然 )함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고대 로마 문화와 신화의 현주소가 바로 여기이니까. 온갖 신들의 운명과 투쟁, 애증, 사랑이 이 나폴리 바다 지중해 곳곳에 미만해 있는 것 같다. 지중해가 막 그 천(千)의 얼굴을 내게 엿보이고 있다. 10분 정도 지중해의 초겨울 바다를 응시한다. 해변엔 닥지닥지 붙어서 거대한 조형물이라도 세워진 듯한 나폴리 항구의 정경이 아침 역광에 부서지고 있다. 구름 속에 삐져나온 햇살의 미묘한 작용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수식보다는 ‘나-폴-리’라는 소리가 주는 야릇한 정감. 크레타 섬, 시칠리아 섬을 중심으로 한 유럽문명, 라틴 문화의 태동지. 이곳을 무대로 하여 전개되었을 고대 유럽 역사의 현장에 내가 서 있다. 그래서 그 매력을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이 미묘한 빛의 조화를 흔쾌히 뷰 파인더로 응시해 본다. 그 결과가 이루어낼 엄청난 역사성, 현장성을 기대하면서 연신 셔터를 누른다. 11:30에 나폴리 언덕을 떠났다. 버스가 점점 항구로 진입하니 그 뒷골목이 길을 연다. 연립주택 같은 닥지닥지 붙은 건물 창밖으로 걸려 있는 너절한 빨래거리가 마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오.’하는듯 하여 오히려 정겹다. 이불, 담요는 남쪽 베란다에 걸려 있고 형형색색의 화분은 반대편 베란다에 빼곡히 놓여 있다. 12:00에 나폴리 항구 시내에 도착을 했다. 해안 언덕의 종려나무가 탐스러웠다. 바로 옆에 있는 어쩐지 친근한 동백나무를 배경으로 한 컷 만들었다. 12:30 현지식당에서 현지 식으로 점심식사, 식사 중 배가 불뚝한 식당 안내인 악사의 만도린 연주가 일품이다. 익살스런 표정이 이탈리아인의 낙천적이고 다혈질적인 기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음악을 좋아하는 로마인의 취향을 그대로 본다. 음악이 일상화되어서 항상 음악과 함께 사는 이들의 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린 손뼉으로 장단을 맞추고 화답하였다. 오찬 중임에도 연주가 끝난 악사에게 뜨겁고 열렬한 박수로 보답하였다. 악사는 예의 그 사람 좋고 낙천적인 로마인의 전형적인 표정으로 보아 매우 만족한 듯하였다. 베네치아 곤돌라에서의 노신사, 이곳의 악사 모두 로마 문화와 생활의 단면이다. 산타 루치아(SANTA LUCIA)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애창 민요. 그 제목의 뜻은 SANTA는 성(聖), LUCIA는 이름, 그래서 고향을 떠나는 청년이 애인에게 부르는 슬픈 사랑의 노래, 연가(戀歌)다. 나폴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필수 경유지로서 이른바 세게 3대 미항. 그러나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치기배, 폭력배가 난무하는 무법천지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가끔 총격전도 일어난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도 유럽 사람들은 예부터 태어나면 나폴리를 보고 죽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나폴리는 꿈의 항구다. 나폴리의 민요 칸소네가 중저음으로 저 지중해 시칠리아 섬에서 들려오는 오는 듯하다. 악사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멋진 점심을 즐긴 후 이러한 나폴리를 뒤로하고 여기서 한 시간 거리인 폼페이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교체된 현지 가이드가 짧고 간단한 영어로 안내를 한다. 이게 이탈리아의 관광가이드 규정이다. 지역을 할당해서 그 지역 사람만 안내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현지인 일자리 우선 보장책인 셈이다.
폼페이는 인도의 봄베이(뭄바이)와 혼동되기 쉽다고 지적하면서 가이드의 안내는 다음과 같다. 폼페이 최후의 날은 타락한 인간, 저주받은 도시의 최후를 신이 경고한 사건이라고도 하는 것은 지나친 종교적 해석인 듯하다고. 폼페이는 종교적 타락으로 멸망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이게 그 당시 로마 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라고 했다. 폼페이는 처음부터 이탈리아 남부의 화려한 항구도시이며 환락도시로 번성하였다. 로마에서 200km 떨어진 나폴리 남쪽에 있는 폼페이시를 1961년에 우연히 발굴함으로써 당시 시민들의 생생한 실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언덕, 터널 등도 발굴되었는데, 터널은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고 ‘포르타바르나’라고 하는 바다로 통하는 문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문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는 약 25,000명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모두들 부유층이었는데 그 사실은 반듯한 집의 흔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의 구획정리와 같은 블록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도는 위쪽, 마차도는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도(人道) 사이에는 징검다리 같은 것을 설치해서 횡단한다. 보도에는 하얀 돌을 심어서 달빛에 빛나도록 해서 그 경계를 나타낸다.
아래 [ ]안은 괴테의 기록이다.
[3월 6일 베수비오 화산 등정 이윽고 우리는 무시무시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분화구 입구에 이르렀다. 그 안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한 줄기 맑은 공기마저 앗아갔지만 그와 동시에 빙 둘러 수많은 틈새 사이로 김을 내뿜는 분화구 내부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 광경은 교훈적인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니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유로 뭔가를 보게 되길 고대하며 계속 머물러 있었다. ]
베수비어스[Vesuvius] 산은 서기 79년에 화산이 폭발하였다. 작열(灼熱)상태로 되어 있는 화산재와 화산력(火山礫)이 14km나 떨어진 폼페이시를 뒤덮는 데는 28시간이면 충분하다. 1차 엄습이 있었고 그 후 1주일 동안 강풍에 날린 화산재는 이 도시를 완전 범죄의 미궁으로 빠뜨렸다. 전조 조짐이 있어서 재빨리 피난한 사람은 대부분 구조되었다. 그러나 노약자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목숨보다 재물에 더 미련이 있는 시민들은 늑장을 부렸다. 이들 중 2,000명이 뜨거운 화산재에 묻혀서 순식간에 살은 기화(氣化)하고 뼈만 남게 된다. 인간이 화산 가스를 마시면 부식이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순식간에 인간의 육질은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화한다는 것이다. 한 순간 역사의 화려한 현실에서 영원의 침묵과 비밀로 가라 앉아버린 상태로 1,900년 동안이나 잠들고 있었다. 현재 900여 m 높이인 베수비어스는 휴화산이다.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른다. 실제로 대 폭발이 일어난 후 현재까지 70여회의 화산 폭발이 있었고 8회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산 정상에는 백두산 천지 모양을 분화구가 있는데 깊이는 200m, 직경이 600m가 되고 현재도 군데군데에 검은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다. 지하 12km에는 지금도 마그마가 끓고 있다. 여기까지는 일정상 내가 직접 탐방하지 못하고 괴테의 기록을 대신해야하는 것이 아쉽다. 화산재는 20피트 깊이로 도시를 묻어버렸으며 60피트짜리 바위도 녹여버린 흔적이 드러나 있다. 1961년에 비로소 발굴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이 공개되었다. 기화(氣化)되어 텅 빈 육신이 차지했던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서 굳게 하여 제작된 석고상들이 유리관에 마치 밀랍 인형처럼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지옥 불에 단말마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필사의 탈출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마치 미라처럼 생생한 모습이다. 엄마가 죽고 영문 모르는 아가가 엄마를 찾다가 굳어버린 모습, 달아나면서도 은제 그릇을 가져가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굳어진 모습, 엎드려 몸부림치면서 죽어가는 남자의 표정, 유난히 확대된 포경(包莖)의 남성(男性)을 가진 우스꽝스러운 남자 모습 등 그 날의 모습이 생생하게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보듯 나타나 있었다. 대부분의 중요한 유적은 나폴리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가이드의 자세한 안내를 바탕으로 2,000년 전 로마의 한 도시 폼페이의 광장과 뒷골목을 거닐어 보았다. 목욕탕에 딸린 탈의실, 베티 형제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의 벽에 그려진 음화(淫畵)와 적나라(赤裸裸)한 성풍속도(性風俗圖)는 그 당시 사람이 얼마나 자유분방하였으며 지금보다 못지 않은 원초적 쾌락을 추구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행위 체위의 생생한 벽화가 군데군데 그려져 있다. 여성상위니, 배후위 같은 생생한 체위 그림을 보니 인간의 일상사는 2,000년 전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들의 쾌락과 탐욕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사통오달(四通五達) 도시 계획으로 뻗은 돌이나 석고로 포장된 도로가 정교하다. 원형극장 건물,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가 있는 아폴로 신전 건물 등 공공건물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고고학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도시를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보존하려면 폼페이처럼 순식간에 화산재로 덮어버리는 천재지변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용암 분출(噴出)형 화산은 용암이 지나가는 근처의 모든 것을 깡그리 파괴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베수비어스처럼 폭발(爆發)형 화산은 화산재가 뿜어져 주변을 덮기 때문에 생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 잔해라도 이렇게 보존된다고 했다. 나는 망연히 이 폐허를 거닐다가 문득 먼 곳 베수비어스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른바 인간 역사와 삶의 허망함이 이처럼 극명하거늘 부생(浮生)의 한 생을 어찌 살아감이 과연 올곧은 것인지 하고.
허망한 역사를 뒤로 하고 소렌토로 향했다. 소렌토 가는 길은 옅은 갈색과 엷은 연두색이 파스텔화의 질감처럼 부드러웠다. 그래서 나는 심신이 무척 편안한 상태. 비는 그쳤지만 낮은 구름 사이로 지중해의 양광(陽光)에 하늘과 바다는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문득 카프리 행 도선장 간판이 눈에 띤다. 너무나 아득한 곳에 있다고 여겨지던 카프리 섬으로 가는 이정표. 그러면 여기서 어디쯤인가. 그 카프리 섬은. 소렌토 해변은 마치 제주도 서귀포 해안처럼 단애의 층층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른바 지질학에서 말하는 주상절리(柱狀節理) 형태이다. 항구에는 어선인지 요트인지 모를 작은 배들이 빼곡히 들어 서 있고 하늘은 더욱 낮아 보였다. 시간이 급해서 소렌토 항구까지는 가지 못하고 항구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서 지중해가 품고 있을 만한 영원한 고독과 사유. 그 실체를 한두 컷 필름으로 담아보려는 것 역시 허망한 몸짓인가. 바닷가에 좀 떨어져 있는 우람하고 고풍스런 성채가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유럽 여행은 교회, 성당, 사원이나 그림 같은 성의 연속이라더니 모처럼 영화의 배경으로 언젠가 보았음직한 고성(古城)의 위용은 시간 여행을 거꾸로 하는 것 같다. 여기는 가죽 제품이 유명한 곳. 그래서 가죽 공장 한 곳을 방문하는 코스가 남이탈리아 여행의 종착지. 여기가 긴 여정의 반환점. 여행 중엔 가죽 제품이든 무엇이든 쇼핑에는 정말 잼병이다. 관심도 전혀 안 생긴다. 다만 한없이 신비로운 지중해를 바라보며 그 너머 어디 있을 크레타, 시칠리아 등지를 그려보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돌아오는 길은 날이 많이 저물었다. 저녁 공기는 선선하고 놀이 선명한 것 보니 날은 말끔히 갰다. 그러나 도로의 차가 몹시 정체되었다. 가이드의 자상한 설명도 귀찮은 듯 모두들 잠에 곯아떨어졌다. 아침에 보았던 우산 위 혹은 부로콜리 모양처럼 위만 남겨 놓고 아랫도리는 깡총하고 시원스레 이발한 소나무 가로수들이 어둠 속에서도 언뜻언뜻 보인다.
오늘은 유독이 하루 종일 어쭙잖은 망념 한 조각 땜에 좀 심란하고 우울하다. 이럴 때마다 언제나 주문처럼 외는 것은 ‘피할 수 없다면 이 상황을 즐길 것. 정면 승부로 돌파할 것. 결코 피하지 말 것. 그 무엇이든지 나의 내부 심신에서 나온 것이니 애정을 가지고 동행하며 친구삼을 것. 이게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화두(話頭). 그래서 인생 여정이라는 여행길은 구도(求道)의 과정,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나는 번뇌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자각.’ 흔히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경구로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결과 아닌가. ‘가장 즐거울 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을 잊지 말고, 가장 힘들고 슬플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을 잊지 말라’는 우리의 중용(中庸) 철학(哲學)의 확고한 실천. 무릇 군자가 지나치게 가벼이 행함을 경계하고 근신(謹愼)하는 사고방식이 몸에 배여서 나타나는 일종의 강박(强迫)증세. 여행이 주는 소중하고 절대적인 매력은 달콤함, 흥분됨, 호젓함, 멜랑콜리, 호기심, 신비함과 같은 복합적이며 화려한 정서이겠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나의 심적 상태는 이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며 값비싼 대가라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닐 터. 그러면서 또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기분을 다스려 본다. 저녁에는 로마의 밤하늘에 별이 보일 정도로 청명하게 개였다. 로마에서 마지막 밤, 아쉽게 깊어 간다. 호텔 객실에서 이제 귀로의 짠한 아쉬움이 남는다. 가족들, 담임학급의 학생들, 동료 직원들, 친구 친지들 등, 두고 온 모든 분들에게 줄 기념품과 선물 준비와 고르기에 몰두하는 것도 여행의 한 즐거움, 그러나 다소 민감해진다. 목걸이, 문구류, 야주, 벨트, 목도리, 보석함, 과자, 인형, 쌍둥이칼 등 목록을 챙겨 보았다.
아래 [ ]안은 괴테의 기록이다.
[4월 3일 팔레르모, 어디를 둘러보나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세계를,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
5월 13일 메시나 부근의 선상에서, 시인은 본래부터 이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을 마치 가까이 등에 대고 붙어있는 경이로운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이 시적 하구로 조작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의 상상력은 하려고만 들면 모든 대상을 실제보다 더 넓고 더 높이 묘사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본질 이상의 특성과 존엄과 가치를 대상에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해 온 것이다. 상상과 현실의 관계는 운문과 산문의 관계와 같은 것이어서 운문이 사물을 강렬하고 급격하게 파악한다면 산문은 언제나 평면으로 확산될 따름인 것이다. 나는 삶의 기복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에게 마치 뱃멀미처럼 일어나는 이런 상념들을 좀처럼 떨쳐버리지 못했다.
5월 14일, 사람은 언제나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때에 감각적이며 도덕적인 모든 인상이 가장 강력해진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5월 26일, 필리포 네리는 명성도 드높고 유쾌한 기억을 되살려주는 분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는 강렬한 종교적 충동을 느낄 수 있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내면에서는 고매한 종교적 영감이 무르익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기도가 가져다 준 선물이요,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무언의 기구이며, 눈물과 법열의 보시이고, 땅에서 떠오르고 비상하는 영적인 부양의 은급입니다.] [1997.12.1.(월, 제10일/12일)] 2020.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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