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여행 기록, 셋째 날 오후/ ‘구이린[계림,桂林]’의 계수(桂樹)나무, 아득한 이국정취가 계수나무의 향보다 더욱 나를 미치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청솔고개 2021. 2. 11. 23:08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여행 기록, 셋째 날 오후/ "숙소로 향하는 좌우 산의 윤곽들이 벌써 구이린[계림, 桂林]의 특이한 풍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주 몽환적이었다. 늦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기운에 어디선가 계수나무의 향내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

                                                                청솔고개

   다음은 쑤저우 전당강(錢塘江)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육화탑(六和塔)을 둘러보고 서둘러 상하이로 향발했다. 여기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강은 음력 8월 18일 전후해서 바닷물이 나팔모양으로 역류해서 파도를 이루는데 높이가 8m나 되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항저우를 떠나면서 서호를 일군 소동파나 백거이 등 중국 역대 최고의 시인들의 행적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에 자꾸만 멀어져가는 이 고도에 눈길을 떼지 못하였었다. 그리고는 피로에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모자라는 수면 시간에다 쌓이는 피로에다 밤낮으로 마셔대는 술이 상승작용을 해서 취생몽사(醉生夢死) 경지에 이를 것 같았다. 취생은 좋지만 몽사는 아직 좀, 왜냐하면 아직은 이 세상에 둘러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상하이 공항에서 구이린까지는 약 2시간 걸린다. 그런데 항공편이 듣던 대로 제멋 대로다. 이번에는 좌석이 나 혼자 외로 되어 있었다. 국적은 미상이나 시원하게 생긴 처녀인 듯한 여자 승객이 옆에 앉는다. 암만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아서 구이린 도착 30분 전 쯤 피곤해서 쉬는 눈치를 실례하고 망설이다가 말을 붙여 보았다. “당신 중국인입니까?” 영어로 물어보았더니만 이외로 호의적으로 응대한다. 서툰 영어에다 한자 필담(筆談)으로 나눈 대화의 대강은 이렇다. 일본 나고야에서 유학하면서 일본문학을 전공하는 중국 구이린 시내에 사는 대학생이라고 하면서 이름은 ‘林雪’이라 했다. 처음에는 나보고는 일본인인가 물었다. 나는 이어서 이 오지의 중국아가씨가 우리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나 싶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더니 나의 표현이 불확실해서 그런지 잘 모른다나. 그래서 대한민국 2002월드컵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더니 확실히 인식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나의 신상에 대한 것(가족사항, 직업 취미 등), 일본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사항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중심으로 한 소설,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金閣寺)’ 등 읽은 것들이 제법 있으니 밑천은 안 달리는 법. 최근 내가 본 영화 중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고 히로스에 료코와 다카쿠라 켄이 출연한 일본 불멸의 명화 ‘철도원’(뽀뽀야)에서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법 통하니 대견하고 신기했다. 나는 얼굴 두껍게 외국인과 대화하는 데는 벌써 몇 차례의 노하우는 구축한 셈. 미서부여행 때나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 때 서툰 영어 구사해보기 위해서 일부러 거리 쇼핑해 본 일, 베이징 여행 시 택시 기사와의 필담, 일본 홈스테이 교류단과 4차례 만남(2001년 5월, 2002년 1월, 5월에 2차례 등)을 통하여 얼굴에 철판 까는 습관은 어지간히 들인 셈이니 말이다. ‘林雪’양에게 중국여행 가이드북에 구이린 시내 지도를 보여주었더니만 시내 자기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이웃을 두어서 진한 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이럴 때 한비야님 방식대로 한국풍물 엽서나 태국문양이 새겨진 기념품이라도 준비했다면 하나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쉽다. 앞으로는 국외여행하면서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뭐라도 좀 준비해서 꼭 선물을 해 보아야겠다.

   드디어 구이린 공항, 네온사인으로 장식한 종려나무인지 야자수가 공항 앞에서 휘황하게 우리를 반긴다. 더욱 남쪽으로 날아와서 아열대의 훈훈한 기온을 예상했지만 이외로 바람이 불고 제법 추위를 느낄 정도로 쌀쌀했다. 상하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구이린[계림, 桂林]’의 계수(桂樹)나무가 주는 묘함, 중국 남서부 내륙 오지라는 아득한 이국정취가 계수나무의 향보다 더욱 나를 미치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오지 여행 전문가 한비야님이 이 구이린과 리지앙[璃,漓江]을 얼마나 동경해 마지않았던가! 이에 대한 그의 여행 기록을 나는 너무나 큰 감동을 가지고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새 바뀐 현지가이드는 미스터 ㅊ는 고향이 이북 황해도라나, 상하이 가이드 선대 고향이 경북이라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그러나 안내할 때 발음 등 우리말 솜씨는 더 나은 것 같다.

   숙소는 桂林賓館(BRAVO HOTEL)이었다.  숙소로 향하는 좌우 산의 윤곽들이 벌써 구이린[계림, 桂林]의 특이한 풍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주 몽환적이었다. 늦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기운에 어디선가 계수나무의 향내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현지가이드 미스터 ㅊ는 구이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안내하였다.

   동방의 명주(明珠)로 불리는 구이린[계림, 桂林]은 동경 110도, 북위 25도에 위치, 여름 기온 26-30도C, 겨울기온 4-8도C, 연평균기온 16-20도C, 강수량은1,600-2,200mm의 자연 조건, 5월초, 7월초 2모작하기 때문에 특히 미질(米質)이 좋다고, 따라서 특산물로는 유자, 나한과, 쌀국수 등이다. 풍광의 특징은 산청(山靑, 산이 사철 푸르다), 수수(水秀, 물이 맑다), 동기(洞奇, 동굴이 기이하다, 석회암 동굴 3,000여개), 석미(石美, 옥돌 즉 비취가 아름답다) 등 네 가지, 인구 67만의 이 도시를 상징하는 것은 상비산(象鼻山, 코끼리 옆모습을 닮은 산), 도시는 곳곳에 계수나무가 자생하기 때문에 이름도 구이린[계림, 桂林]으로 유래. 계수나무는 빨간 꽃의 단계(丹桂), 노란 꽃의 금계(金桂), 하얀 꽃의 은계(銀桂), 사시사철 피는 사철桂로 그 종류가 나눠지고 이 꽃으로 담은 삼화주(三花酒)나 계화주(桂花酒)는 절인 두부, 구이린 고추장, 수박껍질로 만든 약(藥)과 더불어 계림사보(桂林四寶), 각 봉우리에는 玉이 다량 생산되고 내일 유람할 리지앙[灕 혹 璃, 漓 江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리지앙의 이름의 한자 표기는 제 각각이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지 미확인 상태나 가이드는 ‘灕’로 표기하면서 그 뜻은 물이 ‘나눠진다.’라고 설명함]은 중국에서 보기 드문 1급수라서 쏘가리가 있으며 와와어라는 애기 울음소리를 내는 특이한 고기가 가 살고 있다고.

   한국에서 오는 구이린[계림, 桂林]관광객은 연간 30여만 명이나 되는데 그 이유는 몇 년 전 한국의 인기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배경으로 처음 소개된 이후 각종 광고 촬영의 배경이 되었고 특히 한국의 인기 그룹인 HOT의 강타가 공연한 후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이 그 이유가 아니겠냐고 했다. 외국관광객으로는 대만과 한국 관광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전래 동양의 산수화에 나오는 친숙한 배경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내 나름대로의 짐작이다. 계수나무향내 얼마나 매력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인가! 몸만 파김치가 아니었더라면 중국 남서부 오지, 다시는 올 수 없을 구이린[계림, 桂林]을 밤 새워 지켜보고 싶으련만.

   식사 후 예의 여행 대장 N님의 집합 명령(?)이 떨어지고 우리는 복종하는 졸개들처럼 호텔로비에 모여서 하회를 기다린다. 또 그 야시장 가잔다. 야시장이라 야사시한, 야한 시장인가? 왜 그리 좋아하는가? 택시를 타고 가니 2-3분도 안 되는 곳 “亞太酒店”(아태주점)이란 조금 구린 듯한 건물에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뭔가? 바로 몬도가네 시장을 들어와 버렸네. 입구에 수족관이나 통에 들어서 꿈틀거리는 것들은 모두 보양을 위해 사육되고 있는 엽기적(獵奇的)인 구이린산(産) 생사(生蛇), 자라, 산꿩 등이다. 여인네들은 기겁을 하면서도 소리만 지르고 도망치지 않은 것을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 아마 내심 이런 엽기적인 사태를 기대라도 하였다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제법 이 분야에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남정 몇몇이서 아는 체하면서 가이드 미스터 ㅊ을 앞세워서 흥정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자정이 다되어 가는데도 국적 미상의 식도락가들이 그것도 남녀 짝을 이루어 이 식당을 찾아온다는 데 있다. 아마 오늘 이 순간에 나의 신상에 대한 기록을 다시 써야하는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기도 하다. 몇몇 남정들은 입맛을 다시면서 주문한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상에 오르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다. 벌써 술은 몇 순배 돌아가고 이 엽기적 식품과 관련된 지난 무용담을 입에 게거품을 물고 토해낸다. 그런데 사계의 전문가들 견해는 오늘 이 가격이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거의 3분지 1로 흥정되었다는데 무척 만족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기조식(運氣調息)하면 그 기운이 정확히 3일 후 한 곳으로 모이는데 바로 구혈(口穴)이라나. 속된 표현으로 ‘양기(陽氣)가 입에 모아진다.’는 것. 이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라는 식이다. 드디어 첫 코스, 사혈(蛇血)하면 좀 근사한 표현인가? 선홍색 뱀피가 구이란산(産) 계화주(桂花酒)를 따른 작은 컵에 스포이트 잉크처럼 붉게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탐하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나는 순간 나의 기록을 조금만 갱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적구도 하지 않고 나중에 나오는 산꿩탕과 생사탕(生蛇湯)만 몇 숟갈 맛보았다. 생사탕 맛보기는 분명 나의 기록 갱신이다. 생사탕은 어떻게 요리를 했는지 구수한 게 비위도 거슬리지 않고 제법 먹을 만했다. 어린 시절 산에 소 먹이러 갔다가 악머구리며 뱀을 잡아서 ‘바비큐’ 해서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도 뱀구이는 한사코 마다했는데 드디어 뱀탕에 맛을 들이다보니, 사람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인가. 미식가들은 한 방울 국물도 남기지 않고 식탐(食貪)한 뒤 손으로 입을 닦으면서 연신 아쉬워하는 눈치지만 벌써 새벽 두 점이 넘어 가는데 무슨 궁량(窮量)이 있으랴?

   아아! 구이린의 새벽에는 그 우아한 계화 향기 간 곳 없고 생사의 피비린내만 바람결에 날리누나. 아무튼 구이린에서의 새벽, 이 기이(奇異)한 체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모두들 기분 좋게 취해서 숙소로 돌아온다. 야삼경이지만 먼 곳 가까운 곳의 스카이라인에는 어린 시절 그렇게도 많이 보아왔던 산수화 그대로이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구이린이다.

   모르긴 해도 모두들 현지 가이드 미스터 ㅊ의 엄포(?)에 우리는 꼼짝 못하고 내일 새벽 7시 출발에 차질이 없도록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 아닌 체념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혹여 모닝콜을 못 들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은 떨칠 수 없었다. [2003. 1. 22. 수. 오후]     2021.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