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여행 기록, 둘째 날 오후, 호구산(虎丘山), 소주에서 항주까지 가는 길/끝없이 이어지는 운하와 물을 채워놓은 논 같은 것이 이국의 풍정으로 나의 눈을 사로잡..

청솔고개 2021. 2. 9. 00:39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여행 기록, 둘째 날 오후, 호구산(虎丘山), 소주에서 항주까지

                                 청솔고개

   다음은 호구산(虎丘山), 호랑이의 언덕이란 뜻이다. 원 이름은 해용산(海涌山).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대서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이 강남 지역은 산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이 호구가 제법 큰 산 축에 속한다나.

   호구(虎丘)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476년) 말기에서부터 유래한다.

   그러니 여기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니 오월동주(吳越同舟) 등의 고사(故事)의 고향인 셈이다. ‘와신상담 (臥薪嘗膽)’, 이 고사의 의미는 다 알려져 있다시피 ‘섶에 누워 쓸개를 씹는다.’라는 뜻으로 원수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딤을 비유하는 말이다.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해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이 복수를 위해 거북한 섶에서 누워 자고 방안에는 쓸개를 달아 두어 식사 전에는 쓸개를 핥으며 지냈던 고사의 고향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그의 아버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묘역으로 조성하였던 곳이다. 그래서 호구(虎丘)란 이름은 장례를 지낸 지 3일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또 다른 전설은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속에 검 3천 개를 함께 묻었다고 하는데 명검도 다수 포함되었다는 소문에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이 도굴을 실시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와서 도굴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어서 검지(劍池)라고 부른다. 이 검지에서 ‘삼국지’의 오나라 왕인 손권(孫權)도 명검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지만 단 한 개의 검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높이 40m의 언덕인 호구의 정상에는 쑤저우의 상징인 47.5m인 8각형 7층탑이 있다. 운암사탑(雲巖寺塔) 일명 호구탑이라고도 한다. 약 15도 기울어져 있는데, 눈으로 보기에도 기울어진 경사가 느껴진다. 말하자면 중국판 피사탑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벽돌 탑으로 961년에 완성되었다. 입구를 들어오면 오왕(吳王) 합려가 명검을 시험하기 위해 내려지니 두 동강났다는 조그마한 암반이 있다.

   겨울 산이지만 그래도 강남이라서 찬바람은 좀 덜하나 회갈색의 겨울 빛은 내 고향이나 예나 별반 다르지 않다. 왕소군, 양귀비,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인 서시(西施)를 위해서 황제가 그녀의 고향 마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놓은 이곳 호구산은, 강남 제일 경, 그래서 강남 가는 제비의 심정은 그래도 좀 이해할 만하다. 이 호구탑 앞 작은 바위 위에서 중국의 역사와 전설이라도 담으려는 듯, 모두들 즐겁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가 지금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강남 실력자인 손권(孫權)의 무대인 강남 지역을 주유(周遊)하고 있으니 당대의 그들의 모습이 무척 궁금하였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후손인 손권이니 만큼 그 심오한 책략에다 주유니 제갈근과 같은 책사(策士)를 얻어 이 강남을 도모하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영웅들의 족적이 갈수록 흥미를 더한다. 이는 ‘삼국지연의’에 한번이라도 심취해본 사람은 공통된 심경일 게다. 당대를 풍미(風靡)하면서 권문세가(權門勢家)를 주름잡았던 경국지색(傾國之色) 강남(江南) 미인들의 자취도 찾아보고 싶고, 천하의 적벽대전(赤壁大戰)의 무대이자 소동파(蘇東波)의 호호막막(浩浩漠漠)한 시 세계의 본향(本鄕)인 장강(長江)의 그 적벽(赤壁)도 떠오른다. 그 장강은 예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알고 싶었다. 가이드는 아쉽게도 다음에 얘기해 주겠다고 답할 뿐. 아마 이에 대한 자세한 식견이 없는 듯.

   이에 대한 지리 및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삼국지에 나오던 당대의 사실을 한 사이트에서 인용하여 보았다.(http://www.samgugji.net/samgugji/saminmulsa.htm)

   시호(諡号) 태황제(太皇帝).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湖北省襄陽県)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촉(蜀)나라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 후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나,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関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위(魏)․ 오(呉)․ 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 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 장시[江西]․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1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이것을 들은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漢帝)를 청하였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 위에 올라 연호를 황무(黄武)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建業: 南京)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蜀漢)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山越)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異民族)을 토벌 진무(鎮撫)하고, 타이완[臺灣]․ 하이난섬[海南島] 방면에도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며, 랴오둥[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한편 고사(故事) ‘오월동주 (吳越同舟)’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오(吳)나라 군사와 월(越)나라 군사가 한 배에 타게 되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끼리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여기 강남지역 오나라가 바로 이 고사(故事)의 고향이랄까. 동양 역사의 현장이랄까 새로운 감회에 잠겨본다.

   이어서 실크 공장 견학 갔다. 소속돼 있는 중국 강남의 미인 모델들의 몸짓을 가까이서 훔쳐보는 맛도 빼놓을 수 없는 이번 여행의 별미다.

   가이드의 권유로 발 마사지를 받아보았다. 결코 사치가 아니었다. 여행길에서는 꼭 필요한 코스 같았다. 점심 때 먹은 반주가 피로와 상승해서 마사지 시작하자마자 잠에 빠져버려서 어떤 과정으로 했는지는 분명치는 않지만 여독의 8할은 해소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여류여행전문가 한비야님의 말대로 여행을 잘 하려거든 발을 잘 받들고 공경해야한다면서 발의 피로를 푸는 방법을 강조하던 것이 생각나서 여행에 대한 노하우를 하나 챙기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쑤저우를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서둘러 전용버스로 더 남쪽인 항저우로 향했다. 오후 서너 시이지만 안개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 흐린 하늘, 흐린 들녘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운하와 물을 채워놓은 논 같은 것이 이국의 풍정으로 나의 눈을 사로잡는다. 일행은 모두 피로로 곤하게 잠에 떨어져 있지만 나는 마치 서부 애리조나 텍사스 평원을 건너는 기분으로 소항원로(蘇杭遠路) 멀고 아득한 길을 달려간다. 졸다가 눈을 떠도 가도 가도 회색 기와와 가지런히 이어진 똑같은 집단 부락, 그리고 거의가 물이 채워진 얕은 저수지와 같은 농토, 물길과 농로의 이어짐……. 항저우 가는 길은 그냥 물의 천지라서 이렇게 멀고도 멀까.

드디어 항저우 도착해서 호텔에 가기 전에 용정차 농원에 들러서 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아내는 특히 내가 차를 좋아하고 혈압 등 건강에도 좋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10만 원어치 넘는 차를 구입했다. 용정차는 알아준다고 하고 별다른 기념품 살 것도 없을 것 같으니 이것으로 중국 기념으로 삼자고 호응했다. 항저우에 도착해서 식사 후 호텔가기 전에 풍물 야시장을 둘러보았다. 가이드는 좀 꺼리지마는 어쩔 것인가. 잡다한 골동품들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다. 기념 삼아 한 점 사고 싶었지만 결국은 대개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으로 보아 참았었다. 杭州香溢大酒店(항주향일대주점 HANGZHOU SUNNY HOTEL)에서 여장을 풀고 택시를 타고 모두들의 여흥을 위해 노래방을 찾았다. 풍진만리 이역에서 노래방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오가면서 항저우 서호(西湖)의 야경이 이국의 정취를 훔치면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내일 서호 유람의 꿈을 기대하면서 여독을 풀었다. [2003. 1. 21. 화. 오후]     2021.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