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여행 기록, 넷째 날 오후, 다섯째 날, 복파산(伏波山), 독수봉(獨秀峰), 돌아옴/태극의 S를 옆으로 놓아서 제도나 조각을 해도 그렇게 정확하게 못할 정도로 다듬..

청솔고개 2021. 2. 13. 00:23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여행 기록, 넷째 날 오후, 다섯째 날, 복파산(伏波山), 독수봉(獨秀峰), 돌아옴

                                                                   청솔고개

   드디어 동굴을 나오니 바로 선착장이다. 가마우지를 훈련시켜서 강의 고기를 잡아 올리는 풍물이 특이하였다. 드디어 유람선에 올랐다. 우리들은 선실에서 모두 나와서 갑판 위에 올랐다. 배는 작고 소박한 규모이지만 갑판 위에도 포장을 쳐서 제법 격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강바람은 쌀쌀하기보다 오히려 시원할 지경이었다. 아열대 지역이라서 강변이나 산봉우리에 좀 바래지기는 하였지만 녹청색 식물들이 겨울 리지앙[璃, 漓江] 유람의 쓸쓸함을 다소나마 가시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일급수라는 설명대로 강물 빛이 중국에 와서 본 것 중 가장 맑았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한 5분 경 마치 공제선의 윤곽이 정확히 태극의 S를 옆으로 놓아서 제도나 조각을 해도 그렇게 정확하게 못할 정도로 다듬어진 봉우리가 앞을 떡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이러니 ‘이강산수백리화랑’(璃, 漓江山水百里畵廊)이니 선경(仙境)이니 하는 표현이 과연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겠다. 강안(江岸) 가까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연두색 대숲은 리지앙[璃, 漓江] 강물의 영원하고 유구한 흐름을 지켜보고 이 강을 주유했을 천하의 시인 묵객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모두 자연의 영원함에 비해 인간의 유한함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실감했을 터, ‘천만 년 강의 흐름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비탄이 들려오는 듯하다.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아!’하는 소리만. 헬 수 없는 수많은 봉들이 겨울 안개에 겹쳐서 비경(悲境)을 연출하고 있다. 중국 도가의 신선(神仙)이란 말이 주는 신묘한 뉘앙스를 체득하려면 바로 여기 와야 하지 않을까? 감히 비로소 신선의 경지를 조금을 알 듯하다. 조물주가 빚을 수 있는 가장 기묘한 형상을 마치 병풍이나 팔진도(八鎭圖)의 요새처럼 풀어헤쳐 놓았다.

   이런 절경(絶景)에 취한다면 절창(絶唱)이나 절구(絶句) 따를 법하지만 대신 명주(名酒)인가. 선상에서는 벌써 구이린[桂林] 명주인 계화주 한 잔씩 한 두 순배 돌아간다. 옛 천하의 영웅호걸이나 신선들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강물은 비단결처럼 고요한데 오르내리는 유람선들의 모습도 갖가지다. 중국 특유의 황금빛 기와로 치장하여 전통가옥처럼 꾸민 3층 배가 참 멋있어 보였다. 3층은 그냥 정자처럼 만들어져 있었는데 서로 마주치면서 손을 흔들고 환호하는 모습이 좋다. 서양인들의 모습도 더러 눈에 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하고 있으면 모두들 마음도 활짝 열리나 보다. 여기서 쏘가리 등 생선을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고기잡이 나룻배들의 모습이 곳곳에 눈에 띤다. 이는 쑤저우나 항저우의 정크선(거룻배)과는 또 다른 풍광이다. 천하절경에 취하고 천하명주에 취하니 내 어찌 즉흥시 한 수 없을 소냐. 가만히 마음속으로 읊조려 본다. 이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선녀들이 놀던 그 곳을 떠날 수밖에.

   돌아오는 길의 진창은 여전했다. 진창 만리인가. 다시 장족(壯族) 소수민족 마을을 지난다. 문득 대여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이가 땅콩주머니를 내밀면서 적선을 바라는 모습에 모두 할 말을 잃고 외면하던 모습이 밟힌다. 이럴 땐 어떻게 하여야 바르게 하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그러면서 내내 한비야님의 여행 법을 떠올려 본다. 그러면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간단한 기념물을 준비해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왜냐하면 소수민족 어린애가 구걸하듯이 매달릴 때, 엽서 한 장이나 볼펜 한 자루라도 주는 것이 단 돈 천원 주는 버릇을 들여서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가 소수 민족 마을에 묵을 때 이런 기념물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는지 그의 여행담 곳곳에서 절절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은 구이린[桂林] 시내 리지앙[璃, 漓江] 강변 옆에서 현지 식으로 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아열대지역 특유의 이름 모를 상록수들이 짙은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 미스터 ㅊ에게 이게 계수나무인가 물었더니 그 가로수는 비파나무라고 했다.

   그 계수나무는, 후한 마원(馬援) 복파(伏波, 파도를 잠재움)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사당이 있는 복파산(伏波山) 입구에 보란 듯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나는 신기한 무엇이라도 발견한 듯이, 이게 바로 구이린[桂林]을 상징하는 계수나무로구나, 겨울이니 사철 계수나무이겠거니 하면서 자그마하여 앙증맞은 꽃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이 겨울에는 어떤 향(香)으로 ‘나그네의 심회를 달랠거뇨’ 하면서. 그러나 꽃망울은 너무 연약해 보였다. 마치 장족의 소녀들처럼.

   입구 강변에는 동굴과 부처가 새겨진 기이한 바위가 있었고 가마우지로 물고기 사냥꾼이며 예쁘게 단장한 소수민족 아가씨가 눈에 뜨인다. 어디가나 가슴이 에이는 것 같았다. 300여 돌계단을 돌아 정상에 올라가니 구이린[桂林]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북쪽으로는 시내의 기봉(奇峰) 중에서 가장 높고 가파른 독수봉(獨秀峰), 서쪽으로는 첩채산(疊彩山)을 비롯하여 수많은 연봉(連峰)들이 운무(雲霧)와 풍진(風塵)에도 의연히 연꽃잎 병풍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이어서 상비산(象鼻山)을 찾았다. 리지앙[璃, 漓江]과 도화강(桃花江)의 합수 지점에 있으며 마치 코끼리가 강물을 마시려하고 있는 거대한 조각상처럼 보였다. 내게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여유가 있었다면 미처 답사하지 못한 이 ‘연꽃이 겹쳐진 듯한 봉’[蓮峰]들을 모두 올라가 보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을 속으로 접는다.

   원래 웅호산장(熊虎山莊) 선택 관람을 가이드는 권유했었는데 모두들의 반대로 가지 않아서 사기가 많이 저하된 것 같아서 마음이 무척 불편하게 되었다. 소수민족 박물관을 찾았는데 박물관이란 이름은 가당치도 않고 그냥 자료 몇 개 전시해 놓은 전시실에 불과했다. 이곳은 광서장족(廣西壯族)자치구로 장족(壯族)이 1,400여만 인구로 전체 소수민족의 절반이상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요, 묘족(瑤, 苗族)을 비롯한 11개의 소수민족에 대한 통계자료가 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중국이 왜 이렇게 복잡한 소수민족을 거느리려고 하는지 그 이유도 생각해보았다.

   국내인솔 가이드 ㅊ전무가 저하돼 있는 가이드 미스터ㅊ의 사기를 제고하기 위한 방안으로 구이린[桂林]산(産) 발마사지를 긴급 제안해서 분에 넘치게 두 번씩이나 발 호강을 시키게 되었다. 오지여행전문가 한비야님 역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본인이 가장 숭상하는 신체부위가 얼굴이 아니고 발바닥이라고 강조하고 발의 피로를 푸는 자기만의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는 발 숭상 프로그램을 잘 실천하게 된 셈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가냘픈 장족 총각 처녀들의 발 서비스는 감동 그 자체였다. 쑤저우보다 이곳이 이런 면에서는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이제 구이린[桂林]을 떠나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역시 1시간 이상 연발이 아닌가.

   다시 비행기로 추억의 강남 구이린[桂林]을 떠나 진한 어둠을 뚫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세 번째 방문인 셈이다. 몸은 도착하였는데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전부 잘못된 줄 알았었는데 1시간이나 지나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중국 국내 민항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모두들 파김치가 되어갔지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 상하이에서의 첫 밤이라면서 또다시 야시장 가자는 분위기다. 버스를 탄 채로 그대로 시내 허름한 골목에 도착하여 상하이의 밤풍경에 푹 빠져 새벽을 맞이하였다. 무슨 상하이의 ‘하리마오’라도 되는 듯이 우리는 이렇게 이역의 뒷골목을 누비었다. 역시 상하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양고기, 양의 신 구이 등등 상해 판 산해진미라면 될까? 그래도 나는 운기조식(運氣調息)한다고 최대한 절제하였다. 호텔에 도착하니 아침이 곧 밝아올 5시 가까이 되어버렸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바로 체크아웃 시간. 아아, 풍진만리(風塵萬里) 중국 남부 기행도 이렇게 끝나나 보다. [2003. 1. 23. 목. 오후]

   푸동 공항을 가는 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파아란 하늘에 흰 뭉게구름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시계(視界)는 아침인데도 멀리부터 잔뜩 흐려 있었다. 부산발 중국민항 MU5043편이 11시 넘어서 출발해서 잠깐 눈을 좀 휴식하고 있었는데 바로 서해안 조국 산하의 섬들과 아기자기한 해안선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중국 대륙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고향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고 소식을 들었었는데 김해공항에 내리니 고국의 산천은 산뜻한 눈 덮인 모습에 시원한 대기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제법 수북이 쌓인 눈 무더기가 바로 여기가 고국이구나 하고 실감토록 하였다. 모두들 한마디, ‘역시 대한민국이여!’

   그래서 우리의 풍진만릿길 여정은 종막을 고하고 있었다. 우리 열일곱 사람의 가슴엔 못 다한 여정(旅情)만이 가득히 품은 채……. [2003. 1. 24. 금] 2021. 2. 13.